광나루와 삼개포구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송파나루 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송파나루 또한 나루터이기때문에 기본적으로 교통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교역의 중심가로 손꼽히는 장소였다.[1] 어떤 식으로 교역이 이루어졌고 어떤 문화적 요소가 강조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내용
송파나루 위치
현재 서울시 송파구 석촌호수로에 위치한다. [2] (본래 강 쪽에 위치하였지만 강남개발을 진행하면서 땅도 매립되어 호수에 위치하고 있다.) [3]
송파나루는 서울과 광주(廣州)를 잇는 중요한 나루로, 잠실(蠶室)과의 사이를 왕복하고 땔나무와 담배 등을 서울에 공급하였다. 이곳에는 송파진(松坡鎭)의 군영이 있었으며, 송파진의 별장(別將)이 송파나루와 삼전도(三田渡)·동잠실·광진(廣津)·독음(禿音) 등의 나루터를 함께 관할하였다.
송파나루는 조선시대 전국 10대 상설시장의 하나로 꼽힌 송파시장을 배경으로 번성하여 물화(物貨)의 집산(集散)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교통요지였다.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와 자동차 교통의 발달로 송파시장이 쇠퇴하여 그 영향을 받았으나, 나루터의 기능은 1960년대까지 뚝섬과 송파를 잇는 정기선이 운행되어 명맥을 유지하였다. [4]
현대 송파나루
1960년대 말에 이르러 강남지역의 개발이 시작되었고, 1970년 송파나루 앞으로 흐르던 한강 본줄기를 매립하고 성동구 신양동 앞의 샛강을 넓혀 한강 본류로 삼았다. 이로서 송파나루는 완전히 사라지고 지금은 한강을 메우다 남긴 석촌호수에서 겨우 그 흔적만을 짐작할 수 있다. [5]
이조 판서 홍계희(洪啓禧)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영장(營將)이 토포사(討捕使)를 겸하면 당하관으로 차출하지 않아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수어청의 세 영장 가운데 죽산(竹山)은 본디 당하관의 벼슬자리이지만, 높여서 당상관의 벼슬자리로 만들었으니, 광주 토포사(廣州討捕使)는 이천(利川)으로 옮겨 보낸 뒤 또한 높여서 당상관의 벼슬자리로 만들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아직 당하관으로 차출하고 있으니, 일이 매우 들쭉날쭉합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당상관으로 차출하여 보내도록 하겠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경강(京江)의 진선(津船)과 각선(各船)의 수세(收稅)를 한강(漢江)·노량(鷺梁)·양화(楊花) 세 진(津)의 별장에게 붙였는데, 이는 균역 사목(均役事目)입니다. 송파진(松坡津)에 이르러서는 곧 대변(待變)하는 곳이므로 사체가 세 진에 견주어 더욱 중요한데, 광주에 속하였기 때문에 균청(均廳)에서 관장하는데 들지 않습니다. 신은 한결같이 세 진의 예에 따라 균청에서 구관(句管)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