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련의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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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련의 곡


강명화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



개요

<비련의 곡>은 동아문화협회가 제작하고 일본인 조천고주(하야카와 마스다로)가 감독과 각본을 맡은 영화이다. 문영옥과 문수일이 주연으로 출연했다. 조선극장에서는 1924년 11월 하순에 개봉된 것으로 보인다. 『시대일보』의 기사[1]에서는 11월 23일부터 개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KMDb 사이트에서는 11월 28일에 개봉된 것으로 되어 있다. 관련 기사들 대부분이 이 영화가 경상도 유지의 아들인 장병천과 평양 기생 강명화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음을 시사한다. 이 사건이 워낙 대중에게 인기 있는 이야기였는지, 그들의 연애담을 영화로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화제성을 제법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극장에서도 꽤 흥행한 모양이었는데, 작품 자체만 놓고 보자면 이례적으로 영화계의 비판이 거세게 쏟아졌던 영화였다.

내용

강명화와 장병천의 연애 서사

이 영화의 사정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영화의 주제인 강명화와 장병천의 연애 이야기를 볼 필요가 있다. 이 둘의 이야기를 전한 기사들과 위키백과의 정보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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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권번 기생인 강명화가 길에서 일본인들에게 희롱당하는 것을 경상도 유지의 아들인 장병천이 구해준다. 그 일로 두 사람은 가까워져 연인 관계로 발전하고, 강명화는 항상 장병천의 곁을 지켰다. 그러나 장병천의 집안은 강명화를 요부(妖婦)로 여기며 둘의 결혼을 반대했고, 이에 장병천은 집을 나와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강명화와 함께 도피 생활을 하가다 경성에 동거 생활을 시작한다. 강명화는 그 과정에서 자신 때문에 세간에 부랑자 취급을 받고, 출세길도 막히게 된 장병천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그러던 중 강명화가 문득 온천에 가고 싶다는 말을 꺼내, 둘은 온양온천으로 여행을 떠난다. 강명화는 1923년 6월 11일에 장병천이 잠시 외출한 틈을 타 쥐약을 먹고 자결한다. 자신이 죽으면 장병천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 출세길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외출을 나갔다가 돌아온 장병천은 강명화가 죽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두 차례의 시도 끝에 10월 29일에 경성 자택에서 쥐약을 먹고 자살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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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관련된 기사, 논평, 페이지를 종합.



지금으로써는 '집안의 반대로 인한 젊은 연인의 비극'은 사실 그렇게 특별하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자유 연애가 흔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제법 큰 사회적 이슈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주목에 관해서는 당시 이 둘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보도한 『동아일보』의 1923년 6월 16일자 기사[3]를 먼저 볼 필요가 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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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여행으로 온천에 이른 강명화는 늘 자살한 기회만 타다가 마침내 10일 오후 11시 경에 몰래 사두었던 "쥐잡는약"을 마셨다. 약을 마시고 난 강명화는 즉시 장병천의 품에 안겨 "나는 벌써 독약을 마신 사람이니 마지막으로 안아나 주시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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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꼿가튼몸이 생명을 끈키까지에」, 『동아일보』, 1923.06.1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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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강명화)는 드디어 11일 오후 여섯시 반에 애인의 무릎을 베고 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장병천이가
"내가 누구인지 알겠나..."
물음에 그는 눈물에 젖은 야윈 낯에 웃음을 싣고
"세상 사람중에 가장 사랑하는 '파건'......"
이라고 일렀다 한다. "파건"은 곧 장병천의 별호이니 그의 마지막 일념은 오직 "파" "건" 두 자에 맺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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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꼿가튼몸이 생명을 끈키까지에」, 『동아일보』, 1923.06.16. 중에서



이 기사는 위와 같이 단순히 두 사람의 사건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읽는 사람의 감정을 고조시킬 만한 소설투의 문체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둘의 사건을 다룬 이후의 글들은 대부분 위의 기사를 인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만큼 위의 기사가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사한 바로는 강명화와 장병천의 연애담을 다룬 다른 기사는 『동아일보』의 기사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렇다면 당시의 일반 대중들은 위의 기사를 강명화와 장병천의 실화이자,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일종의 대중적 서사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성공적인 마케팅 - 그에 미치지 못했던 기술력

조선극장에서는 강명화의 죽음과 같은 해에 이러한 강명화의 서사를 영화 이전에 연극으로 올리려는 시도를 했었다.[5] 그러나 일제 당국에 의해 제지당한 것으로 보인다.[6] 그러나 이듬해 당시 극장 운영주였던 일본인 조천고주(하야카와 마쓰다로)가 기생 문영옥과 배우 문수일을 섭외하여 이 이야기를 각색해 영화로 만든다. 그것이 바로 <비련의 곡>이다. 조천고주는 이미 이 영화 이전에 <춘향전>[7]을 조선 최초로 영화화하여 조선극장에서 상영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 제법 큰 수익을 올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비련의 곡> 또한 당시 대중에게 깊이 각인된 이야기였고, 또다른 흥행의 기회였기에 강명화와 장병천의 서사를 앞세워 홍보가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많은 관객들이 극장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작품성의 측면에 있어서 <비련의 곡>은 아주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당시의 조선 영화들에 대한 감상평은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조선 영화가 많이 제작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영화에 대한 비평 또한 영화 관련 기사에 작성자가 넣은 짧은 평가 정도가 전부인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련의 곡>과 관련된 아래의 감상평들은 그 의도가 오로지 이 영화 자체를 비판하는 것에 있음을 볼 수 있고,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원색적인 비난의 표현 또한 등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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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고대하고 있던 일반 관중들은 그 사진 여하는 물론이고 그 사적(강명화의 일화)이 활동사진으로 출현하였다는 것만 좋아서 다소 환영을 하는 사람이 있을런지 알 수 없으나 그 사진이 장병천, 강명화 정사 사건과는 얼토당토않은 허위임을 아는 사람은 그 허위선전으로 관중을 기망하여 폭리를 취하려는 그 사람들의 간흉한 계획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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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극장의 활사 비련의 곡이란 조선의 모욕」, 『시대일보』, 1924.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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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그 사진은 어떠하냐면 그 각색에 있어서 그 촬영 기교에 있어 근년 영화계에서 드물게 보는 걸레 같은 작품으로 조선의 시네마 팬을 속여먹은 것이라고 일반이 분개하여 문제가 된 모양인데 하여간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아도 조선의 인정 풍속을 무시한 추악한 씬(scene)과 어린아이들 장난 같은 그 자막과 또는 그 영화를 일관하는 기분이 예술품으로의 가치를 인정할 수 없을뿐만 아니라 이따위 사진을 상연한 조선극장의 낯바닥이 뻔뻔스럽더라고[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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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명종」, 『조선일보』, 19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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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그 사진이 사진이냐 막걸리냐 세트가 되었느냐 광선을 잘 썼느냐? 애화 채색이 잘 되었느냐? 이것을 썩 좋은 사진이라고 속여 구경꾼의 돈만 먹는 그대들은 사기한이다 다른 신문에는 이에 대한 말이 있었는데 매일신보에만 어찌 이 말이 없소? 당신들 눈에는 그것이 사진으로 뵈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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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방란: 눈뜨고 못 볼 비련의 곡」, 『매일신보』, 1924.12.03.



국문 민간 신문이었던 『시대일보』와 『조선일보』, 조선총독부 주관지였던 『매일신보』를 막론하고 일제히 <비련의 곡>을 이토록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쏠렸던 관심에 비해 영화의 완성도는 다소 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위에 인용된 『매일신보』의 감상평은 스토리, 소품, 세트, 촬영 기술 등의 거의 모든 분야를 조목조목 짚으며 비난했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 강명화의 일화가 워낙 유명했을뿐 아니라, 그것을 처음 보도한 『동아일보』의 기사문이 영화로 치면 명대사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만큼 관중들의 기대감이 높았던 것을 이러한 실망감의 원인으로 뽑을 수도 있으나, 위의 기사들이 공통적으로 전반적인 부문에 걸쳐 비판한 것을 보면, 실제로 당시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해도 졸작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이승희, 「조선극장의 스캔들과 극장의 정치경제학」, 『대동문화연구』72,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117-158쪽.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KMDb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주석

  1. 조선극장의 활사 비련의 곡이란 조선의 모욕」, 『시대일보』, 1924.11.30. 1면,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online, 국립중앙도서관.
  2.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에서는 쥐약을 먹었으나 그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기술했으나, 같은 날 『동아일보』의 기사에서는 그가 쥐약을 먹은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또한 『매일신보』의 기사는 장병천을 사회주의에 물든 한량으로만 묘사하고 있으나, 『동아일보』의 기사는 강명화의 죽음 이후 그의 염세적이고 방탕한 생활뿐만 아니라 강명화를 그리워하는 듯한 말과 행동들까지 함께 실려 있다.
    부호의독자 장병천의자살」, 『동아일보』, 1923.10.30. 3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애인의 방혼을 추적할, 결심으로 경북부호 장길상씨의 장남이 쥐잡는 약을 먹었다」, 『매일신보』, 1923.10.30. 3면,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online, 국립중앙도서관.
  3. 꼿가튼몸이 생명을 끈키까지에」, 『동아일보』, 1923.06.16. 3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4. 인용된 기사는 가독성을 위해 현대어로 옮김.
  5. 명기의 애화가 조선극장에 공연, 죽은 강명화의 일대기를 각색」, 『매일신보』, 1923.07.26. 3면,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online, 국립중앙도서관.
  6. 휴지통」, 『동아일보』, 1923.07.31. 3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7. 이 페이지에 들어가면 감독과 각본은 조천고주, 제작자는 조천증태랑이라고 나와 있는데, 모두 동일인물이다. 조선극장의 극장주나 경영주와 관련하여 자세한 논의는 아래의 논문 참조.
    이승희, 「조선극장의 스캔들과 극장의 정치경제학」, 『대동문화연구』72,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117-158쪽.
  8. 조선극장의 활사 비련의 곡이란 조선의 모욕」, 『시대일보』, 1924.11.30. 1면,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online, 국립중앙도서관.
  9. 자명종」, 『조선일보』, 1924.12.01. 2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10. 개방란: 눈뜨고 못 볼 비련의 곡」, 『매일신보』, 1924.12.03. 3면,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online,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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