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인 묘와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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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공 변종인 신도비
작성자 틀, 공장공 변종인 신도비, 조선 무신 변종인(卞宗仁), 재봉틀의 국어방, 네이버 블로그.
대표명칭 공장공 변종인 신도비
한자 恭莊公 卞宗仁 神道碑
주소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산63-7
지정번호 부천시 향토유적 제1호



해설문

기존 국문

변종인(卞宗仁)은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자원(子元)이다. 아버지는 변예생(卞禮生)이고, 어머니는 배천조씨(白川趙氏)이다. 1460년(세조 6) 무과에 급제하였고, 1467년(세조 13)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당상관이 되었다. 1473년(성종 4) 조전장(助戰將)으로서 여진족을 격퇴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1478년 행온성도호부사, 공조참판, 전라도병마절도사, 영안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486년(성종 17) 영안북도병마절도사로서 오랑캐의 침입을 방어하지 못하고 태만하였다는 이유로 장형에 처해져 변방으로 충군(充軍)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 1487년 중추부동지사로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에 다녀왔다.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로 각 도를 옮겨다닌 후, 1494년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다시 명에 다녀왔다. 1496년(연산군 2)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이어 경상우도수군절도사를 역임한 뒤 12회에 걸쳐 변방을 지키는 임무를 맡아 국방을 튼튼히 하는 데 공헌하였다. 1498년(연산군 4) 고령으로 수군절도사직을 사임하였으나 다시 공조판서에 임명되었고, 공조판서를 거쳐 중추부지사로 재임 중 병사하였다. 부인은 이천안씨(利川安氏)이다. 1986년 4월 29일 부천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향토문화전자대전)


수정 국문

조선시대의 무신 변종인(卞宗仁, 1433~1500)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변종인은 일찍 부모를 잃었지만, 스스로 노력해 세조 6년(1460)에 무과에 급제했으며, 세조 13년(1467) 함경도 지역의 지방세력인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열두 차례나 변방을 지키는 임무를 맡아 여진족을 격퇴하는 등 국경 방어에 공헌하였으나, 재임 중 병을 얻어 죽었다.

신도비는 사각형의 받침돌,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릿돌은 무신을 상징하는 투구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받침돌에는 문갑 무늬와 안상(眼象)을 새겼다.

비문은 당대의 유명한 문장가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었고, 명필로 이름났던 안침(安琛, 1445~1515)이 비석의 제목과 글씨를 썼다.

원래 변종인 신도비는 그의 묘와 함께 현 고강동 복지회관이 있는 곳에 있었는데, 이 신도비가 세워진 직후부터 일대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자주 나자 마을 주민들이 의견을 모아 지금의 위치에 변종인의 묘역을 조성하고 신도비를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현재 신도비는 후손들이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1996년에 세운 비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비각 뒤편에는 변종인과 부인 이천안씨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 변종인은 임금의 명을 받아 지방의 민심을 살피는 순변사가 되어 함경남도에서 변방을 구축하다가 과로로 병을 얻어 사망했다.
  • 몸돌의 크기는 높이 154cm, 폭 76cm, 두께 20cm이다.
  • 머릿돌을 연꽃 모양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므로 확인이 필요함 -> 옥개의 모양이 투구가 아니라 연꽃으로 되어 있다. 투구모양이라고 하면 양옆이 투구처럼 둘둘 말려 올라가야 하는데 그게 없다. 칼을 들고 싸우는 무관이라고 해도 신도비에는 하엽형(荷葉形)이라고 해서 연꽃을 형상화해서 음각한 것을 썼다. 이를 화관석(花冠石)이라고도 부른다. (출처 : 콩나물신문)
  • 신도비각 일대에는 변종인 부부의 묘를 비롯해 밀양변씨 가문에서 조성한 묘역이 밀집되어 있다. (참고 : 블로그-개미실사랑방)
  • 안침은 문장에 능하여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편찬에 편수관(編修官)으로 참여하였고, 필법은 송설체(松雪體)로서 해서에 뛰어났다고 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차 수정

영문

참고자료

  • 변종인 묘와 신도비,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변종인_묘와_신도비 → 연산군 5년(1499) 여름에 순변사로 함경남도에서 변방을 구축하다 이해 과로로 인하여 풍질이 생겨 다음 해인 1550년 3월 대청에서 타계하니 그 때 나이 68세였다고 한다. / (현지 안내문 인용) 연산군 1년(1495) 평안도절도사·경상우도수군절도사를 역임 전후 12회에 걸쳐 변방을 지키는 임무를 맡아 국방력 강화에 공헌했다. 연산군 4년(1498) 공조판서를 거쳐 지중추부사로 있던 중 68세를 일기로 하세하니, 시호는 공장공이다.
  • (부천)공조판서 변종인(卞宗仁) 묘‧신도비 –밀양변씨-, 개미실사랑방,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roaltlf/222522127463 → 신도비 실제 사진(전체, 부분) / 인근에 조성된 밀양변씨 묘역 확인 가능
  • 조선 무신 변종인(卞宗仁), 재봉틀의 국어방,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kwank99/30174569276 -> 이미지 출처(작성자 틀, 게시일 2013.8.23.)
  • 공장종 변종인 신도비, 경기문화재연구원 https://gjicp.ggcf.kr/archives/artwork/공장공-변종인-신도비
  • 강상골에 밀양변씨 향나무, 공장공 변종인 신도비가 있다, 콩나물신문, 2019.1.14. http://www.kong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5141 → 강상골 향나무는 밀양변씨 종가집에서 공장공 변종인 신도비로 올라가는 언덕배기에 서 있다. 아주 큰 향나무지지만 오른쪽에만 잎들이 조금 살아있고 나머지는 죽은 가지를 달고 있다. 지금은 밀양변씨 제실인 흑량제(黑梁祭)의 뒤쪽 담안에 가두어 놓았다. 향나무 아래는 많이 패여 있다. 밀양변씨 집안 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때 향을 피우기 위해 쪼개다 써서 그렇게 되었다. 공장공 변종인 신도비 주인공인 변종인이 강상골에 살 때 심었다고 전해져 오는 향나무이다. // 강상골 언덕을 오르면 밀양변씨 집안 묘역이 눈에 들어온다. 여러 묘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밀양변씨 선산이다. 공장공 변종인 신도비각이 보인다. / 신도비각은 팔작지붕이 있고, 지붕 아래에는 현판이 걸려 있다. 보통 신도비는 묘에서 바라보았을 때 주로 동남쪽 방향에 세웠다. 이는 선친이 죽어 ‘혼령이 다니는 길’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신도비각 옆에는 변종인에 대한 설명판이 세워져 있다. / 마지막으로 1499년 66세에는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전국을 돌면서 군사를 독려하는 순변사로 함경남도에서 변방을 구축하다가 과로로 풍질이 생겨 사망하게 되었다. / 변종인 신도비의 머리부분을 옥개(屋蓋)라고 한다. 이 옥개의 모양이 투구가 아니라 연꽃으로 되어 있다. 투구모양이라고 하면 양옆이 투구처럼 둘둘 말려 올라가야 하는데 그게 없다. 칼을 들고 싸우는 무관이라고 해도 신도비에는 하엽형(荷葉形)이라고 해서 연꽃을 형상화해서 음각한 것을 썼다. 이를 화관석(花冠石)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신도비의 받침대인 비좌(碑座)는 문갑(文匣) 무늬로 되어 있다. 신도비 뒷면에는 변종인의 일생이 새겨져 있다. 마모가 되어 읽기 힘들다. 비문은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인 성현 선생이 지었다. / 원래 변종인 신도비는 고강동복지회관이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변종인 묘지도 거기에 있었고 신도비도 거기에 세워진 것이었다. 그런데 변종인의 신도비가 세워진 직후부터 고리울 일대에 원인모를 불이 자주 났다. 자주 불이 나고 좋지 않은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자 주민들이 불안에 떨었다고 했다. 마을 주민들이 의견을 내서 신도비를 옮기자고 했다. 그래서 현재의 자리로 변종인의 묘역을 조성하고 신도비를 옮기자 고리울 일대에서 일어났던 화재가 멎고 안 좋은 일들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고 했다.
  • 변종인 신도비, 디지털부천문화대전 http://bucheon.grandculture.net/bucheon/toc/GC01601182
  • 변종인, 디지털부천문화대전 http://bucheon.grandculture.net/bucheon/dir/GC01601197
  • (참고) 이시애의 난 관련 → 장말손 적개공신교서 항목 설명 참조 가능 ; 1467년 함경도 지역의 지방세력인 이시애가 세조(1455-1468 재위)의 중앙집권체제 강화 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켰다. 3개월에 걸쳤던 반란이 진압되자, 세조는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45명을 공신으로 선정하였다.
  • (참고) 안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50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