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변종인 묘와 신도비
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안
조선시대의 무신 변종인(卞宗仁, 1433~1500)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변종인은 일찍 부모를 잃었지만, 스스로 노력해 세조 6년(1460)에 무과에 급제했으며, 세조 13년(1467) 함경도 지역의 지방세력인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열두 차례나 변방을 지키는 임무를 맡아 여진족을 격퇴하는 등 국경 방어에 공헌하였으나, 재임 중 병을 얻어 죽었다.
신도비는 사각형의 받침돌,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릿돌은 무신을 상징하는 투구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받침돌에는 문갑 무늬와 안상(眼象)을 새겼다.
비문은 당대의 유명한 문장가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었고, 명필로 이름났던 안침(安琛, 1445~1515)이 비석의 제목과 글씨를 썼다.
원래 변종인 신도비는 그의 묘와 함께 현 고강동 복지회관이 있는 곳에 있었는데, 이 신도비가 세워진 직후부터 일대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자주 나자 마을 주민들이 의견을 모아 지금의 위치에 변종인의 묘역을 조성하고 신도비를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현재 신도비는 후손들이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1996년에 세운 비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비각 뒤편에는 변종인과 부인 이천안씨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 변종인은 임금의 명을 받아 지방의 민심을 살피는 순변사가 되어 함경남도에서 변방을 구축하다가 과로로 병을 얻어 사망했다.
- 몸돌의 크기는 높이 154cm, 폭 76cm, 두께 20cm이다.
- 머릿돌을 연꽃 모양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므로 확인이 필요함 -> 옥개의 모양이 투구가 아니라 연꽃으로 되어 있다. 투구모양이라고 하면 양옆이 투구처럼 둘둘 말려 올라가야 하는데 그게 없다. 칼을 들고 싸우는 무관이라고 해도 신도비에는 하엽형(荷葉形)이라고 해서 연꽃을 형상화해서 음각한 것을 썼다. 이를 화관석(花冠石)이라고도 부른다. (출처 : 콩나물신문)
- 신도비각 일대에는 변종인 부부의 묘를 비롯해 밀양변씨 가문에서 조성한 묘역이 밀집되어 있다. (참고 : 블로그-개미실사랑방)
- 안침은 문장에 능하여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편찬에 편수관(編修官)으로 참여하였고, 필법은 송설체(松雪體)로서 해서에 뛰어났다고 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차 수정
조선시대의 무신 변종인(卞宗仁, 1433~1500)의 묘와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신도비이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변종인은 밀양변씨 중 부천 지역에 처음으로 정착한 변예생(卞禮生, ?~1444)의 아들이다. 세조 6년(1460)에 무과에 급제했으며, 세조 13년(1467) 함경도 지역의 지방 세력인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변방을 지키는 임무를 맡아 여진족을 격퇴하였고, 성종 18년(1487)과 성종 25년(1494)에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지내며 국경 방어에 공헌하였으며 재임 중 병을 얻어 죽었다.
변종인의 묘는 부인 이천안씨의 묘와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봉분 아랫부분에 돌을 둘렀는데, 이러한 형태는 조선 전기에 유행한 양식이다. 묘 앞에는 묘비, 제물을 차려 놓는 상석, 한 쌍의 돌기둥인 망주석, 불을 밝히는 장명등, 문인 모양의 문인석을 갖추었다.
신도비는 사각형의 받침돌,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몸돌, 연꽃 모양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문은 당대의 유명한 문장가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었고, 명필로 이름났던 안침(安琛, 1445~1515)이 비석 제목과 비문의 글씨를 썼다. 처음 세워진 시기는 알 수 없고, 원래 변종인과 부인의 묘와 함께 지금 위치에서 남서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지금의 고강동 복지회관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도비 주변 지역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자주 나자 마을 주민들이 의견을 모아 지금 위치에 묘역을 조성하고 신도비를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신도비를 보호하는 비각은 1996년에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