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의 두 판 사이의 차이

광주문화예술인문스토리플랫폼
이동: 둘러보기, 검색
(Definition)
잔글 (문자열 찾아 바꾸기 - "5.18민주화운동_희생자" 문자열을 "5.18민주화운동_희생자_안치" 문자열로)
 
(사용자 3명의 중간 판 6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2번째 줄: 2번째 줄:
 
==Definition==
 
==Definition==
 
*[[5.18민주화운동|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 신군부 퇴진, 민주정부 수립 등을 주장하며 전개한 민주화운동이다. 무장저항이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 수준의 저항을 행사한 사건으로 공식명칭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이다. 아시아지역 민주화운동에 끼친 영향이 인정되어 2011년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인권분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5.18민주화운동|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 신군부 퇴진, 민주정부 수립 등을 주장하며 전개한 민주화운동이다. 무장저항이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 수준의 저항을 행사한 사건으로 공식명칭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이다. 아시아지역 민주화운동에 끼친 영향이 인정되어 2011년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인권분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10.26 사건 이후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등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과 [[정동년]] 등 광주지역 재야인사와 학생회 간부 등을 구속한다. 또 휴교령을 내리고 각 대학에 계엄군을 주둔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휴교령이 내리면 교문 앞으로 모인다는 결의에 따라 [[전남대_정문|전남대 정문]]으로 모인 전남대 학생들은 학교 진입을 시도하다 공수부대에 의해 강제 해산되자 광주역에 재집결해 시위를 계속하며 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시위대가 늘어나자 공수부대는 무차별 진압에 나서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을 마구 구타하고 찌르는 등 만행을 자행했다. 계엄군의 과잉무력진압은 오히려 시민들의 반감을 샀다. 19일에는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이 봉기했으며, 고등학생까지 가담해 시위는 더 격화되면서 시민봉기로 국면이 전환되었다.  
+
*10.26 사건 이후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등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과 [[정동년]] 등 광주지역 재야인사와 학생회 간부 등을 구속한다. 또 휴교령을 내리고 각 대학에 계엄군을 주둔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휴교령이 내리면 교문 앞으로 모인다는 결의에 따라 [[전남대학교_정문|전남대 정문]]으로 모인 전남대 학생들은 학교 진입을 시도하다 계엄군에 의해 강제 해산되자 광주역에 재집결해 시위를 계속하며 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시위대가 늘어나자 계엄군으로 광주에 진주한 공수부대는 무차별 진압에 나서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을 마구 구타하고 찌르는 등 만행을 자행했다. 계엄군의 과잉무력진압은 오히려 시민들의 반감을 샀다. 19일에는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이 봉기했으며, 고등학생까지 가담해 시위는 더 격화되면서 시민봉기로 국면이 전환되었다.  
 
*20일 시위는 더욱 치열해졌다. 이날 오후 전남도청이 있는 금남로 인근에는 20만명의 시위대가 모여들어 곳곳에서 계엄군과 대치하는 가운데 오후 7시께 버스 기사와 택시 기사들이 대형버스를 몰고 계엄군을 압박했다. 광주역 인근에서는 차량을 앞세워 저지선을 돌파하려던 시민들을 향해 이날 밤 11시께 공수부대가 총격을 가하는 최초의 집단발포가 있었다. 광주역에서의 발포 사실이 전해지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20일 시위는 더욱 치열해졌다. 이날 오후 전남도청이 있는 금남로 인근에는 20만명의 시위대가 모여들어 곳곳에서 계엄군과 대치하는 가운데 오후 7시께 버스 기사와 택시 기사들이 대형버스를 몰고 계엄군을 압박했다. 광주역 인근에서는 차량을 앞세워 저지선을 돌파하려던 시민들을 향해 이날 밤 11시께 공수부대가 총격을 가하는 최초의 집단발포가 있었다. 광주역에서의 발포 사실이 전해지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21일 금남로에 모인 시민들은 군의 사과와 광주시민 명예회복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이날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옥상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시민들이 애국가를 따라 부르며 1절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수백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계엄군이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10여 분 동안 총탄을 마구 난사했다. 이어 계엄군은 도청을 향해 나아가려는 청년들은 물론 주변 건물에 있던 사람들까지 조준사격을 가했다. 이날 계엄군의 발포로 최소 50여 명이 사망하고 500여 명이 부상했다.  
 
*21일 금남로에 모인 시민들은 군의 사과와 광주시민 명예회복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이날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옥상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시민들이 애국가를 따라 부르며 1절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수백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계엄군이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10여 분 동안 총탄을 마구 난사했다. 이어 계엄군은 도청을 향해 나아가려는 청년들은 물론 주변 건물에 있던 사람들까지 조준사격을 가했다. 이날 계엄군의 발포로 최소 50여 명이 사망하고 500여 명이 부상했다.  
*계엄군의 만행에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화순 나주 등 시외지역에서 무기를 탈취, 광주로 반입했다. 처음으로‘시민군’이 등장한 것이다. 압도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시민군의 처절한 저항에 놀란 계엄군은 21일 오후 5시부터 8시 사이에 도청 등에서 철수, 광주 외곽지역으로 퇴각하였다.
+
*계엄군의 만행에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서는 무장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에 화순 나주 등 시외지역으로 진출해 무기를 탈취, 광주로 반입하면서 시민들이 무장을 시작했다. 처음으로‘시민군’이 등장한 것이다. 압도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시민군의 처절한 저항에 놀란 계엄군은 21일 오후 5시부터 8시 사이에 도청 등에서 철수, 광주 외곽지역으로 퇴각하였다.
 
*22일 광주를 장악한 시민군은 [[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열어 시민들의 요구사항을 알리고 공동체 구현 등 새로운 시도에 나섰다. 시민들은 빠르게 질서를 회복하고, 부상자들이 입원한 병원에는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경찰의 치안 활동이 없었음에도 은행 같은 금융기관이나 귀금속점에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태 수습 방법과 협상 내용과 방식, 무기 회수 등을 둘러쌓고 수습위원회 내부는 물론 시민들 사이에도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이에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일부 학생과 시민은 25일 밤 새로운 지도부를 자처한 민주시민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도청 사수에 나섰다.
 
*22일 광주를 장악한 시민군은 [[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열어 시민들의 요구사항을 알리고 공동체 구현 등 새로운 시도에 나섰다. 시민들은 빠르게 질서를 회복하고, 부상자들이 입원한 병원에는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경찰의 치안 활동이 없었음에도 은행 같은 금융기관이나 귀금속점에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태 수습 방법과 협상 내용과 방식, 무기 회수 등을 둘러쌓고 수습위원회 내부는 물론 시민들 사이에도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이에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일부 학생과 시민은 25일 밤 새로운 지도부를 자처한 민주시민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도청 사수에 나섰다.
*27일 새벽 탱크 등으로 무장한 2만 5000여 계엄군은 대대적인 무력진압을 펼쳐, 총격전 끝에 새벽 5시 20분께 전남도청을 완전히 장악한다. 계엄군은 도청에 있던 시민군 200 여 명을 전원 연행하는 한편 오전 가택수색을 펼쳐 수습위원회 참여자 등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다수를 군부대인 상무대로 연행했다.  27일 사망한 시민은 도청과 그 주위에서 사망한 17명을 포함 약 25명이다. 이 들 대부분 계엄군이 쏜 M16 소총에 의해 희생되었다.
+
*27일 새벽 탱크 등으로 무장한 2만 5000여 계엄군은 대대적인 무력진압을 펼쳐, 총격전 끝에 새벽 5시 20분께 전남도청을 완전히 장악했다. 계엄군은 도청에 있던 시민군 200 여 명을 전원 연행하는 한편 오전 가택수색을 펼쳐 수습위원회 참여자 등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다수를 군부대인 상무대로 연행했다.  27일 사망한 시민은 도청과 그 주위에서 사망한 17명을 포함 약 25명이다. 이 들 대부분 계엄군이 쏜 M16 소총에 의해 희생되었다.
 
*5.18민주화운동 기간 중 피해자는 총 5,517명이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사망자 155명, 상이 후 사망자 110명, 행방불명자 81명, 부상자 2,461명, 연행구금부상자 1,145명, 연행 및 구금자 1,447명, 재분류 및 기타 118명 등이다.<ref>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5.18민주화운동 https://518.org/nsub.php?PID=010103</ref>
 
*5.18민주화운동 기간 중 피해자는 총 5,517명이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사망자 155명, 상이 후 사망자 110명, 행방불명자 81명, 부상자 2,461명, 연행구금부상자 1,145명, 연행 및 구금자 1,447명, 재분류 및 기타 118명 등이다.<ref>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5.18민주화운동 https://518.org/nsub.php?PID=010103</ref>
  
57번째 줄: 57번째 줄:
 
|-
 
|-
 
| [[5.18민주화운동]] || [[죽음을_넘어_시대의_어둠을_넘어]] ||    || 최초 발간 기록물
 
| [[5.18민주화운동]] || [[죽음을_넘어_시대의_어둠을_넘어]] ||    || 최초 발간 기록물
 +
|-
 +
|}
 +
===Contextual Relations (Semantic Network Graph)===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left"
 +
!source||target||relation
 +
|-
 +
|[[5.18민주화운동]]||[[5.18민주광장]]||happenedAt
 +
|-
 +
|[[5.18민주화운동]]||[[5.18민주화운동_최후항전]]||hasPart
 +
|-
 +
|[[5.18민주화운동]]||[[5.18사적지]]||happenedAt
 +
|-
 +
|[[5.18민주화운동]]||[[상무대]]||isRelatedTo
 +
|-
 +
|[[5.18민주화운동]]||[[안병하]]||isRelatedTo
 +
|-
 +
|[[5.18민주화운동]]||[[위르겐_힌츠페터]]||isRelatedTo
 +
|-
 +
|[[5.18민주화운동_희생자_안치]]||[[5.18민주화운동]]||isVictimOf
 +
|-
 +
|[[5.18민주화운동기록물]]||[[5.18민주화운동]]||documents
 +
|-
 +
|[[5.18자유공원]]||[[5.18민주화운동]]||commemorates
 +
|-
 +
|[[국립5.18민주묘지]]||[[5.18민주화운동]]||commemorates
 +
|-
 +
|[[아아_광주여!_우리나라의_십자가여!]]||[[5.18민주화운동]]||mentions
 +
|-
 +
|[[죽음을_넘어_시대의_어둠을_넘어]]||[[5.18민주화운동]]||documents
 +
|-
 +
|[[5.18기념재단]]||[[정동년]]||member
 +
|-
 +
|[[5.18민주화운동_최후항전]]||[[옛_전남도청]]||happenedAt
 +
|-
 +
|[[5.18민주화운동_희생자_안치]]||[[5.18구묘지]]||wasBuriedIn
 +
|-
 +
|[[5.18민주화운동_희생자_안치]]||[[국립5.18민주묘지]]||wasBuriedIn
 +
|-
 +
|[[5.18민주화운동_희생자_안치]]||[[상무관]]||isRelatedTo
 +
|-
 +
|[[윤상원]]||[[5.18민주화운동_최후항전]]||isVictimOf
 +
|-
 +
|[[조비오]]||[[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hasAffiliation
 
|-
 
|-
 
|}
 
|}

2024년 2월 1일 (목) 20:10 기준 최신판

Definition

  •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 신군부 퇴진, 민주정부 수립 등을 주장하며 전개한 민주화운동이다. 무장저항이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 수준의 저항을 행사한 사건으로 공식명칭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이다. 아시아지역 민주화운동에 끼친 영향이 인정되어 2011년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인권분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 10.26 사건 이후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등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과 정동년 등 광주지역 재야인사와 학생회 간부 등을 구속한다. 또 휴교령을 내리고 각 대학에 계엄군을 주둔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휴교령이 내리면 교문 앞으로 모인다는 결의에 따라 전남대 정문으로 모인 전남대 학생들은 학교 진입을 시도하다 계엄군에 의해 강제 해산되자 광주역에 재집결해 시위를 계속하며 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시위대가 늘어나자 계엄군으로 광주에 진주한 공수부대는 무차별 진압에 나서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을 마구 구타하고 찌르는 등 만행을 자행했다. 계엄군의 과잉무력진압은 오히려 시민들의 반감을 샀다. 19일에는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이 봉기했으며, 고등학생까지 가담해 시위는 더 격화되면서 시민봉기로 국면이 전환되었다.
  • 20일 시위는 더욱 치열해졌다. 이날 오후 전남도청이 있는 금남로 인근에는 20만명의 시위대가 모여들어 곳곳에서 계엄군과 대치하는 가운데 오후 7시께 버스 기사와 택시 기사들이 대형버스를 몰고 계엄군을 압박했다. 광주역 인근에서는 차량을 앞세워 저지선을 돌파하려던 시민들을 향해 이날 밤 11시께 공수부대가 총격을 가하는 최초의 집단발포가 있었다. 광주역에서의 발포 사실이 전해지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 21일 금남로에 모인 시민들은 군의 사과와 광주시민 명예회복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이날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옥상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시민들이 애국가를 따라 부르며 1절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수백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계엄군이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10여 분 동안 총탄을 마구 난사했다. 이어 계엄군은 도청을 향해 나아가려는 청년들은 물론 주변 건물에 있던 사람들까지 조준사격을 가했다. 이날 계엄군의 발포로 최소 50여 명이 사망하고 500여 명이 부상했다.
  • 계엄군의 만행에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서는 무장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에 화순 나주 등 시외지역으로 진출해 무기를 탈취, 광주로 반입하면서 시민들이 무장을 시작했다. 처음으로‘시민군’이 등장한 것이다. 압도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시민군의 처절한 저항에 놀란 계엄군은 21일 오후 5시부터 8시 사이에 도청 등에서 철수, 광주 외곽지역으로 퇴각하였다.
  • 22일 광주를 장악한 시민군은 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열어 시민들의 요구사항을 알리고 공동체 구현 등 새로운 시도에 나섰다. 시민들은 빠르게 질서를 회복하고, 부상자들이 입원한 병원에는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경찰의 치안 활동이 없었음에도 은행 같은 금융기관이나 귀금속점에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태 수습 방법과 협상 내용과 방식, 무기 회수 등을 둘러쌓고 수습위원회 내부는 물론 시민들 사이에도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이에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일부 학생과 시민은 25일 밤 새로운 지도부를 자처한 민주시민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도청 사수에 나섰다.
  • 27일 새벽 탱크 등으로 무장한 2만 5000여 계엄군은 대대적인 무력진압을 펼쳐, 총격전 끝에 새벽 5시 20분께 전남도청을 완전히 장악했다. 계엄군은 도청에 있던 시민군 200 여 명을 전원 연행하는 한편 오전 가택수색을 펼쳐 수습위원회 참여자 등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다수를 군부대인 상무대로 연행했다. 27일 사망한 시민은 도청과 그 주위에서 사망한 17명을 포함 약 25명이다. 이 들 대부분 계엄군이 쏜 M16 소총에 의해 희생되었다.
  • 5.18민주화운동 기간 중 피해자는 총 5,517명이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사망자 155명, 상이 후 사망자 110명, 행방불명자 81명, 부상자 2,461명, 연행구금부상자 1,145명, 연행 및 구금자 1,447명, 재분류 및 기타 118명 등이다.[1]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id class groupName partName label hangeul hanja english infoUrl iconUrl
5.18민주화운동 Event 사건 5.18민주화운동(五一八民主化運動) 5.18민주화운동 五一八民主化運動 5.18 Democratic Movement http://dh.aks.ac.kr/~gwangju/wiki/index.php/5.18민주화운동 http://digerati.aks.ac.kr/DhLab/2022/gwangju/image/daidong1/5.18민주광장-민중항쟁_알림탑.JPG

Contextual Relations

source target relation attribute
5.18민주화운동 세계기록유산 기록물
5.18민주화운동 5.18구묘지 국가기념일 제정 이전 민주인사 안장 묘지
5.18민주화운동 5.18민주광장 활동광장
5.18민주화운동 국립5.18민주묘지 기념묘지
5.18민주화운동 옛_전남도청 최후 항전지
5.18민주화운동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기록물연구 전시 단체
5.18민주화운동 5.18기념재단 추모단체
5.18민주화운동 5.18자유공원 추모공원
5.18민주화운동 5.18사적지 주요 사건 발생지
5.18민주화운동 윤상원 최후 항전자
5.18민주화운동 조비오 시민수습위원
5.18민주화운동 안병하 당시 경찰국장
5.18민주화운동 정동년 복적생
5.18민주화운동 위르겐_힌츠페터 푸른눈의 목격자
5.18민주화운동 상무대 군사재판 영창 소재지
5.18민주화운동 상무관 시신 임시 안치소
5.18민주화운동 아아_광주여!_우리나라의_십자가여! 최초 문학작품
5.18민주화운동 죽음을_넘어_시대의_어둠을_넘어 최초 발간 기록물

Contextual Relations (Semantic Network Graph)

source target relation
5.18민주화운동 5.18민주광장 happenedAt
5.18민주화운동 5.18민주화운동_최후항전 hasPart
5.18민주화운동 5.18사적지 happenedAt
5.18민주화운동 상무대 isRelatedTo
5.18민주화운동 안병하 isRelatedTo
5.18민주화운동 위르겐_힌츠페터 isRelatedTo
5.18민주화운동_희생자_안치 5.18민주화운동 isVictimOf
5.18민주화운동기록물 5.18민주화운동 documents
5.18자유공원 5.18민주화운동 commemorates
국립5.18민주묘지 5.18민주화운동 commemorates
아아_광주여!_우리나라의_십자가여! 5.18민주화운동 mentions
죽음을_넘어_시대의_어둠을_넘어 5.18민주화운동 documents
5.18기념재단 정동년 member
5.18민주화운동_최후항전 옛_전남도청 happenedAt
5.18민주화운동_희생자_안치 5.18구묘지 wasBuriedIn
5.18민주화운동_희생자_안치 국립5.18민주묘지 wasBuriedIn
5.18민주화운동_희생자_안치 상무관 isRelatedTo
윤상원 5.18민주화운동_최후항전 isVictimOf
조비오 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 hasAffiliation

Web Resource

type resource title description url
해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https://518.org/nmain.php
해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18광주민주화운동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8496
참고 대한민국정책브리핑 5.18 민주화운동 제42주년, 전남도청 진압 시 탄의 흔적과 탄두 공개 https://www.korea.kr/news/pressReleaseView.do?newsId=156507344
참고 연합뉴스 '오월을 드립니다' 5.18 민주화운동 42주년 기념식 거행 (2022-05-18, 장아름 기자) https://www.yna.co.kr/view/AKR20220518050000054?input=1179m
사진 광주인문스토리플랫폼사업단 5.18민주화운동 5.18구묘역 http://dh.aks.ac.kr/~gwangju/wiki/images/4/4b/518구묘역4.jpg
사진 광주인문스토리플랫폼사업단 5.18민주화운동 5.18정신 계승과 기념사업을 주관하는 5.18기념재단 http://dh.aks.ac.kr/~gwangju/wiki/images/d/d7/518기념재단.jpg
사진 광주인문스토리플랫폼사업단 5.18민주화운동 5.18기념문화센터에 내걸린 5.18당시 도청 분수대 집회 사진 http://dh.aks.ac.kr/~gwangju/wiki/images/6/64/5.18사진1.jpg
동영상 5.18민주화운동기록관 5.18민주화운동 다큐인사이트 '오월의 기록' https://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19-0296&program_id=PS-2021025616-01-000&broadcast_complete_yn=N&local_station_code=00&section_code=05&section_sub_code=08

Bibliography

type bibliographic_index online_resource url
논문 오수성 신현균 조용범, 「518 피해자들의 만성 외상 후 스트레스와 정신건강」, 『한국심리학회지』, vol.25, no.2 한국심리학회. 2006. KCI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153432
논문 김영기 채종훈 주정민,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유튜브 왜곡영상 네트워크 분석」, 『민주주의와 인권』, vol.21, no.1,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21. KCI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700295
논문 이종범, 「'5.18항쟁’ 증언에 나타난 ‘기층민중’의 경험과 생활」, 『한국근현대사연구』, vol. no.29, 한국근현대사학회, 2004. KCI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0931228
단행본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창비, 2017. https://www.google.com/search?q=9788936486143
단행본 노성만 외 29인, 『5.18 10일간의 야전병원』, 전남대병원, 2017. https://www.google.com/search?q=9788996190264

Notes

  1.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5.18민주화운동 https://518.org/nsub.php?PID=010103

Semantic Network Gra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