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룡스님(金龍, 1892生, 비구니)
금룡(金龍)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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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금룡(金龍) |
법호 | 금광(金光), 월광(月光) |
속명 | |
출생 | 1892.06.15. |
출가 | 1909년 |
입적 | 1965.01.19. (세수 74세, 법랍 57세) |
사찰 | 전주 정혜사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1가 2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금룡(金龍) 또는 금광(金光)스님은 선(禪)과 교(敎)를 겸비한 비구니 대강백이며 3대 법사(금룡, 혜옥,수옥)중의 한 분으로 정화 이후 운문사에 현대식 비구니강원을 처음으로 설립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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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 | 전북 전주시 출생 |
1909 | 경북 청도 호거산 운문사에서 선덕(善德)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11 | 해인사에서 사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통도사에서 혜암현문(慧庵玄門, 1886∼1985)스님으로부터 대교과[1] 수료 | |
1922 | 구하스님에게 입실하여 당호 ‘월광(月光)’을 받음 |
1945 | 부산 소림사 인수 |
1955 | 운문사 주지 역임 |
30여 년간 비구니 법사로 법문행각 | |
1954 | 한국불교 승단 정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
1958 | 건당(建幢)제자 광우스님에게 가사와 대단주 등 법장(法藏) 전함 |
1965 | 전주 정혜사에서 입적(세납 74세, 법납 56세) 사리 3과 수습 |
문중 | 계민문중(戒珉) |
수행지침 | 신심 없는 수행자는 무기 없는 군인과 같다. |
생활신조 | 항상 계행을 스승으로 삼아 만법도생 하는데 조금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일조・영춘・법일・혜명・도정・형을・해운・법상・승열・벽운・정일・도경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정공(定空, 7)→봉전(奉典, 8)→장홍(壯弘, 9)→선덕(善德, 10)→금룡(金龍, 11)→일조(日照, 12), 영춘(永春, 12), 해운(海雲, 12), 법일(12), 혜명(12), 도정(道淨, 12), 형을(炯乙, 12), 정일(淨日, 12), 법상(法相, 12), 승렬(承烈, 12), 벽운(碧雲, 12), 도경(道鏡, 12), 장경(藏鏡, 12), 운종(雲鐘, 12) |
활동 및 공헌
출가
월광당 금광스님은 1892년 6월 15일 전북 전주시 효자동에서 동래 정씨의 정원명 거사님을 아버지로 인동 장씨 장성우 보살님 사이의 삼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스님은 완벽한 불교집안에서 자랐다. 양친은 일생을 소찬[2] 하셨으며 아버지 정원명 거사님은 손수 화엄경에 관한 글을 쓰시고 만공 큰스님과 함께 법담을 나눌 정도로 불교에 심취했었으니 평범한 세인(世人)은 아니었다. 이러한 집안 환경에 따라 자연스럽게 출가 전 아버지로부터 사서삼경을 익히고, 불경을 외우며 강원의 이력 과목도 배웠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출가 전 이미 강원에서 배우는 어려운 글자는 물론 기본적인 경전에 대한 이해도 해박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받은 교육은 스님을 출가로 이끄는 디딤돌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진정한 불자였던 스님의 양친은 삼녀를 출가시키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어머니는 금지옥엽같은 따님을 출가시킬 인연 터를 찾기 위해 여러 곳의 비구니 사찰을 답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운문사 청신암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하얀 고무신을 보고 ‘바로 이 곳이구나. 하였고 맏따님을 정식 출가시킬 차비를 서둘렀다. 그런 후에 예를 갖추어 가마에 태워서 불가에 입문시켜고 삭발염의토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금광스님은 1909년 나이 18세에 운문사에서 선덕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그리고 20세에 해인사에서 사바스님으로부터 금룡(金龍)이라는 법명과 함께 사미니계를 수지함으로써 근대 최초 비구니 법사로서의 행로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후에 스님은 금광(金光)이라는 자호를 애호하였고, 심지어 '금룡'보다는 '금광'이라는 법명을 사용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이에 본 인물사전에서는 스님의 뜻을 기리어 공식 명칭 외에는 모두 '금광'으로 칭했다.
통도사 혜암(慧庵) 현문(玄門)스님으로부터 대교과를 마치고 운문사 초대주지를 비롯하여 서울 개운사 주지 등 대중외호에도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스님은 이(理)와 사(事)를 겸비한 덕망이 높은 분이었다.
구하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고 강사로 활약하다
스님은‘신심 없는 수행자는 무기 없는 군인과 같다. 부처님의 진리를 알려면 남보다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였다. 손에서 경을 놓치 아니하며 공부에 매진한 결과 1922년 31세에 구하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게 되었다. 구하스님은 월광(月光)의 당호를 주셨는데, 비구니스님이 비구스님에게 입실한 최초의 일이었다. 아쉽게도 구하스님으로부터 받은 입실게는 소실되어 현존하지 않지만, 그날 찍은 사진이 전해지고 있다. 사진을 통해 가사를 수한 금광스님의 여법한 모습을 볼 수 있고, 스님의 오른쪽에는 경책 12권과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사 청신암 선교양종대덕주사영 비구니 계사[3] 정금광(慶尙北道靑道郡雲門寺淸神庵 禪敎兩宗大德主師影 比丘尼 癸巳 鄭金光)’이라 적힌 문구가 있다.
스님은 강사로서 많은 비구니스님을 가르쳤는데 예를 들면 일조스님은 1936년부터 청도 운문사 강원에서 금광스님을 강사로 모시고 사집과 사교과, 대교과를 배웠다. 또한 이 때부터 금광스님은 법사로서 법문을 펴기 시작했다.
고기가 물을 만난 듯 봄날에 만물이 소생하듯 스님의 설법은 우매한 중생에게 무명을 씻어주는 감로법우였다. 목마른 사람에게 청량수가 되기 위해 험한 산길도 천리 뱃길도 마다 않고 행한 법문 행각은 1년에 평균 석 달이나 되었다. 한번 법문을 시작하시면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조금도 지루한 줄 모르고 일심동체가 되어 환희심이 충만했다고 한다.
설법 도중 방광
스님은 직장인을 위해서 저녁에도 흔쾌히 법을 설하셨으니 스님의 자비로움은 어느 곳에서나 두루 빛을 발했다. 설법 포교에 얽힌 많은 이야기 중 설법 도중 방광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날도 스님은 부산 소림사에서 전념으로 열반경(涅槃經)을 설하고 있었다. 법석(法席)이 한참 무르익어 숨조차 멎은 듯할 때 스님의 주위가 차츰 밝아지면서 빛이 점점 넓어지고 선명해지더니 서서히 화관을 쓰신 관세음보살님상이 나타나 그 자리를 한참 빛내 주셨다. 불보살까지 감응시킨 그 법문의 경지를 칠흑같이 어두운 이 후학들이 어찌 가름하겠는가!
불교정화운동 참여와 종회의원 활동
금광스님은 3시간 이상을 눕지 않고 61세까지 오후 불식을 하는 등 엄격한 수행과 강설(講說)을 통해 많은 납자들을 눈뜨게 하셨다. 스님은 불교정화 운동에도 적극적인 참여를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제2회 임시총회 (1954년 음력 11월 3일)에서 보선되어 종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운문사 초대주지로 임명, 강당개설
정화 이후 한국불교 정화를 추진해온 실무자 중에서 대찰(大刹)은 40세 이상으로 십하안거(十夏安居) 이상을 참여한 자 또는 대교과를 졸업한 동등자격자라는 자격 조건에 맞는 인물에게 맡기기로 했는데, 이에 금광스님이 운문사 초대주지로 임명받게 되었다 [4] . 주지 소임과 함께 스님은 초대 강백으로서 정화 이후 현대식 비구니강원을 운문사에 처음으로 설립했는데, 당시 통도사 강주로 계시던 오혜륜 스님을 모시고 강당을 개설하였다.
최초로 비구니가 비구니에게 건당(建幢)[5]
스님은 당신이 간직한 법장을 1958년 66세 되던 해에 평소 아끼던 제자 광우스님에게 전하였다. 이것은 비구니가 바구니에게 건당(建幢)한 최초의 일이었다.
부산 소림사
금광스님은 일찍이 교육은 물론 포교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1913년 일본 승려 송영대사가 창건한 부산 소림사를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인수하여 1948년경 일본식 불단을 한국식으로 개조해 1962년 10월 15일에 등기 이전을 마쳤다. 그리고 약 7일이 지나자 상좌 해운스님 앞으로 재이전하고 실질적인 창건주로 사자상승하게 하였다.
입적
그 후 스님은 평소의 바램대로 고향산천에 자리한 정혜사에서 조용히 말년을 보내다가 1965년 1월 19일 세수 74세, 법랍 57세에 자타(自他)의 시비(是非)가 끊어진 자리로 홀홀히 떠났다. 다비식 후 사리 3과가 나왔으며, 스님의 사리는 전주 완산 정혜사 부도에 봉안되어 있다.
스님의 큰 뜻을 이어받은 제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불법 실천에 앞장섰다. 보문종 전 종정 일조 스님을 비롯하여 영춘・법일・혜명・도정・형을・해운・법상・승열・벽운・정일・도경스님과 건당 제자 광우스님 등이 그 법맥을 이었다.
- 운문회보 발취 : 불기 2548년 (1984년 4월 5일) 제 8호
‘금룡(金龍)'보다 '금광(金光)'으로 불리기를 좋아하시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스님을 ‘금룡스님’이라 칭하고 있으나 종인(宗仁)스님[6]의 증언에 따르면 정작 스님 본인은 금룡보다 금광(金光)으로 불리기를 원했다고 한다. 이는 현재 소림사에 남아있는 스님의 유품이 모두 ‘금광’이라고 적힌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금광(金光)’은 스님의 자호(自號)이다. 일설에 의하면 스님은 평소 『화엄경』을 즐겨 독송하였으며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의 광명을 상징하는 ‘광(光)’자를 좋아했다고 한다.
전주 정혜사
전주의 정혜사는 보문종 계열의 비구니 스님들이 공부하는 불교대학이다. 즉, 계룡산에 동학사가 있듯이 이에 버금가는 곳으로서, 전주에 비구니 스님들이 공부하는 대학이자, 기도하는 사찰이 정혜사인 것이다. 때문에 전주 시내 한복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혜사는 산사의 절집 느낌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그만큼 사찰의 분위기가 조용하고 고즈넉한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따로 위치한 산사와 달리 불법수행에 열심인 비구니스님들의 청정한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곳이다.
이러한 정혜사에 가면 비구니사찰의 이미지처럼 연꽃을 비롯한 각종 꽃이 깔끔하고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고 아울러 10여 동 이상의 전각이 배치되어 꽤 큰 규모를 지니고 있는 것에 놀라게 된다.
하지만 정혜사는 1899년 창건되어 110년 된 그리 길지 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정혜사는 원래 이곳의 본사 원장스님인 명주스님의 외조부께서 칠성각을 짓고 득남발원을 위하여 시작된 사찰이기 때문이다. 그후 정명주 스님께서 주지를 역임하면서 정혜사 불사를 하였고 백혜명스님과 정례일스님이 거듭 중창불사를 하여 현재 13동의 전각을 갖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역사 : 정혜사는 1899년에 최향관선생이 득남발원을 위하여 완산 아래 이곳에 조그만 칠성각을 건축하게 한 후 불상을 모시고 그 옆에 십여간 되는 초가집을 사서 사찰을 만들고 절이름을 정혜사라고 하고 기도불사를 진행하였다. 그때의 본사 소재지는 동명이 안행동(雁行洞)이기 때문에 본사의 이름을 ‘안행사’라고 부르기도 하고, 발음이 와전되어 ‘안양사’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정혜사라고 이름 지은 정(定)은 선리(禪理)를 연구하고 혜(慧)는 교리를 널리 알려 정혜쌍수를 실천하자는 취지라고 하겠다.
1921년 정명주 스님이 불교 포교의 원력을 세우고 보광전 15칸, 용화전 1칸을 건축하였으며 명부전, 나한전, 완산선원, 사대천왕문과 아울러 요사채를 건축하여 수행과 포교에 전력을 다했으며, 강원을 설치하여 도제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후 백혜명스님과 현 주지인 정혜일스님이 중건, 중창불사를 거듭하여 지금의 정혜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부산 소림사
소림사(少林寺)는 1913년 승려 송영(松永)스님이 창건하였으며, 해방 직후인 1945년 비구니 정금광(鄭金光)스님이 인수하였다. 1948년 순 한국식 불단으로 개조하여 가람을 수호하며 포교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1950년 음력 2월 15일 저녁에 화엄 산림(華嚴山林) 법회를 열어 설법을 하던 중 방광(放光)을 하여 인근 소방서에서 소림사에 불이 난 줄 알고 소방차가 출동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 후 1995년 승려 정일(淨日)스님이 7년간의 불사 끝에 무량수전을 완공하였다.
소림사는 부산 지역의 지도적인 재가 불자를 양성한 대표적인 사찰로 꼽힌다. 소림사는 전통적인 신행 도량이다. 뿐만 아니라 1970~1980년 대불련 등 부산 지역 내에 있는 대중 신행 단체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다.
소림사를 대표하는 것은 60여 년간 지속해 오고 있는 산림 법회이다. 해운(海雲)스님과 정일스님의 원력으로 대덕 큰 스님들과 함께 하는 법화 산림 법회, 열반 산림 법회, 참회 산림 법회 등의 대법회를 끊임없이 개최하였다. 역대 고승들의 법문과 회주 정일의 대중 기도는 무척 유명하다.
또한 소림사는 부산 대중 불교의 산실과 같은 곳이다. 부산불교신도회, 거사림회 등이 소림사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1970년대 초 대부분의 사찰들이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학생회 등을 사찰 내부에 두기를 꺼려할 때 과감하게 공간을 10년 넘게 제공한 곳이 바로 소림사이다.
소림사에서는 법회와 기도 등을 행하고 있다. 법회는 청년 법회, 대학생 법회, 어린이 법회,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동문 법회, 일요 법회, 부경대학교 불교 동문 법회 등이 있고, 연중 기도로는 정초 신중 기도, 참회 산림 법회, 자비 도량 참법 기도, 백중 기도, 관음 백일기도, 아미타 백일기도, 만년 위패 봉안 제자 천도재 등이 있다.
소림사의 전각은 무량수전과 대웅전이 있다. 무량수전에는 본존불인 아미타불상과 좌우에 관음보살상, 지장보살상을 봉안하고 있다. 무량수전 내에는 신중단, 칠성단, 독성단, 산신단 등이 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상과 관세음보살상, 대세지보살상을 봉안하고 있으며, 지장보살상, 홍법대사상, 부동명왕상도 함께 봉안하고 있다.
출처: 부산역사문화대전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6052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117~120.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3.
- 전국비구니회, 『한국의 비구니의 수행과 삶 2』, 예문서원 2009년, pp. 11~33 .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133~136.
-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p. 183~194
- 법보신문, 100 금룡 스님(1892~1965)(2006년)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9767
- 경향신문, 법희·일엽·혜옥·수옥… ‘한국 불교의 반쪽’ 재조명 (2007년) https://m.khan.co.kr/culture/religion/article/200704051748001#c2b
- 현대불교, 수행·전법·실천 분야서 큰 발자취 한국불교 발전 원동력 ‘자리매김’(2015년)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85221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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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룡(金龍)스님 | 본항목 | 금룡스님(金龍, 1892~1965) | 金龍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금룡스님(金龍,_1892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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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룡스님(金龍) | 계민문중(戒珉) | ~의 일원이다 | |
금룡스님(金龍) | 선덕스님(善德) | ~의 수계제자이다 | |
금룡스님(金龍) | 청도 운문사 | ~에서 출가하다 | |
금룡스님(金龍) | 사바스님(娑婆)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금룡스님(金龍) | 혜암현문(慧庵玄門) | ~(으)로부터 수학하다 | 대교과 |
금룡스님(金龍) | 구하천보(九河天輔) | ~(으)로부터 전강하다 | 입실당호 월광(月光) |
금룡스님(金龍) | 서울 개운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금룡스님(金龍) | 청도 운문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금룡스님(金龍) | 부산 소림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금룡스님(金龍) | 부산 소림사 | ~을(를) 중창하다 | |
금룡스님(金龍) | 운문사 강원(승가대학) | ~을(를) 건립하다 |
지도
- 전주 정혜사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1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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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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