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칠봉-대단위뽕밭
천칠봉-대단위뽕밭 | |
작가 | 천칠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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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연도 | 1973년 |
규격 | 300호(290.9x197cm) |
유형 | 경제 |
분류 | 유화 |
소장처 | 미상 |
목차
정의
김제군 일대의 대단위 뽕밭과 일하는 모습을 그린 민족기록화이다.
설명
작품 소재
양잠업은 60년대 말에서 70년대에 이르기까지 농촌 부흥 운동의 핵심 요소로 자리잡았다. 1966년 당시 농림부에서는 종합농업개발계획의 일부로 71년도까지 누에고치 생산 미 수출을 당해의 4배로 늘린다는 잠사(蠶絲)증산5개년계획을 세우는가 하면[1], 뽕밭만들기 경진대회까지 열어 우승지를 포상함으로써 각 지방 농민들의 의욕을 고취하고자 하였다.[2]
이후로도 1972년부터 제3차 증산계획의 추진으로 1976년도에 수출고는 2억 7000만 달러에 이르러 그 성장 역시 기준연도인 1972년 대비 뽕밭 면적 105%, 고치생산 156%, 생사류 수출고 238%의 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1973년 오일쇼크에 따른 국제경제 침체로 생사값이 오르지 않고 수출이 부진할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는 한국 경제의 급속한 성장으로 농촌의 노동력 부족 및 임금상승 등의 이유로, 다시 감산되었다.
1990년 뽕밭 면적은 1980년의 50% 이상 수준으로 줄었다. 이러한 생사감산 현상은 노동력부족·임금상승도 원인이겠으나, 화학섬유의 보급 확대로 계속 줄고 있는 실정이다.[3]
작품 배경
김제 지역이 본격적으로 야산(野山)을 뽕밭으로 개발한 것은 1968년부터 시작된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을 통해서이다. 이듬해 열린 경진대회에서 산업포상을 받고 본격적으로 사업이 뻗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1971년에 이르면 잠사(蠶絲) 규모가 국내에서 가장 커져, 국제금융공사로부터 30만달러의 出資(출자)를 얻어 최신식 설비를갖추고 뽕밭을 더욱 확대하기도 한다.[4]
시각적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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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칠봉-대단위뽕밭-1975s.jpg
천칠봉-대단위뽕밭
- 정영렬-무진장조림단지-1973s.jpg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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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칠봉 | 천칠봉-대단위뽕밭 | A는 B를 그렸다 | 1975년 |
장성문화원 | 천칠봉-대단위뽕밭 | A는 B를 대여하였다. | 1991년 1월 9일-1992년 1월 8일 |
천칠봉-대단위뽕밭 | 양잠업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
천칠봉-대단위뽕밭 | 김제 대단위 뽕밭 |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 |
양잠업 |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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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 천칠봉이 천칠봉-대단위뽕밭을 그렸다. |
1991년 1월 9일-1992년 1월 8일 | 장성문화원이 천칠봉-대단위뽕밭을 대여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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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99364 | 126.784748 | 장성문화원이 천칠봉-대단위뽕밭을 대여하였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사진
영상
주석
- ↑ "71年까지 4倍로",『동아일보』, 1966년 12월 12일.
- ↑ "紙上 4H競進大會 (1)",『경향신문』, 1966년 11월 30일.
- ↑ "잠사업",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農工竝進의 旗手 農漁村開發公社",『매일경제』, 1971년 8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