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덕(朴大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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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3년(명종 18)~1654년(효종 5) = 92세]. 조선 중기 선조 · 광해군 · 인조 · 효종 때 활동한 의병장. 증직(贈職)은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다. 자는 사화(士華)이며 호는 합강(合江)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조부는 제포만호(薺浦萬戶)박응정(朴應禎)이고, 아버지는 선무랑(宣務郞)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박자진(朴自蓁)이며, 어머니 순천김씨(順川金氏)는 적량만호(赤梁萬戶)김린(金璘)의 딸이다. 조호익(曺好益)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활동

강동(江東)에 유배된 지산(芝山)조호익(曺好益)을 찾아가 『소학(小學)』, 사서(四書), 오경(五經),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등의 글을 배웠는데, 과거 공부에는 뜻을 접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선조가 서행(西幸)하였을 때 스승 조호익이 유배에서 풀려나 소모관(召募官)으로 기용되었다. 이에 박대덕은 조호익의 막하(幕下)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군사를 모아 장정 5백여 인을 얻어서 관군(官軍)의 성세(聲勢)를 도왔는데, 싸울 때마다 그가 반드시 선봉이 되었다. 이때 적의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평양(平壤)에 웅거하며 사방으로 나가 협박하여 약탈하였다. 그러나 관군은 둘러서서 보기만하고 감히 그 예봉(銳鋒)을 꺾고 반격하지 못하였는데, 스승 조호익의 군사만이 중화(中和)·상원(祥原) 사이를 오가며 적을 습격하여 많이 죽이고 사로잡았으므로, 적이 그들의 정예(精銳)함을 두려워하였다. 특히 박대덕은 조호익과 동료 의병장 이희직(李希稷)이 위급하게 된 것을 구원하였다. 평양 부근에서 여러 번 승전한 조호익이 군사를 거느리고 남하할 때 그가 동문(同門) 김익상(金翼商)·윤근(尹瑾)과 함께 조호익을 따라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남하하면서 싸웠는데, 그 충용(忠勇)과 과감(果敢)이 일군(一軍)에서 으뜸이었다. 뒤에 관찰사민성휘(閔聖徽)가 그의 공로를 천거하여 조정에서 준원전 참봉(濬源殿參奉)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의 의병활동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을 때는 그의 나이가 이미 칠순을 넘긴 노령이었다. 박대덕은 가족을 데리고 산중으로 피난하였는데, 양덕(陽德)에서 적군을 만나자, 같이 피난하던 20여 인을 지휘하여 싸워 이겼다. 1642년(인조 20)에 당시 폐허가 된 평안도 성천(成川)의 학령서원(鶴嶺書院)을 중건하여 정구(鄭逑)와 스승 조호익을 제향하였다. 이 공로로 1648년(인조 26)에 부사(府使)이정남(李井男)이 그의 행의(行義)를 조정에 올려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정승 김육(金堉)도, 박대덕의 학행이 뛰어나므로 우대하는 은전(恩典)을 베풀어야 마땅하다고 임금께 아뢰어, 그는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제수받았다. 1654년(효종 5) 3월 7일에 병으로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92세이다.

시문집(詩文集)과 『임진년군중일기(壬辰年軍中日記)』를 남겼으나 소실되었다.

성품과 일화

박대덕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품행이 아주 독실하였다. 어버이가 생존하였을 때에는 멀리 가지 않고 가면 반드시 행방을 알리며, 집이 매우 가난하여도 반드시 맛있는 것을 갖추어 두며 기뻐하는 기색이 늘 용모에 충만하였다. 부모가 별세하였을 때에는 슬퍼하여 야위는 것이 지나쳤고 정성으로 장사하고 제사하며 6년 동안 여묘살이하는 사이에 웃은 적이 없었으며 날마다 묘소에 올라가 곡(哭)하고 앉으면 반드시 묘소 쪽으로 향하여 상사(喪事) 이외에는 문 밖에 나가지 않았다. 스승 조호익이 병란을 겪은 뒤에 영남(嶺南)으로 돌아와 영천(永川)에 살 곳을 정하였는데, 그는 제자의 도리를 다하였고, 상을 당하여는 3년상을 치르고 돌아왔다.

성품이 또 모든 일에 화사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안정(安靜)한 것만을 좋아하였다. 향리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종일 바로 앉아 함부로 웃지 않았고, 모나고 치우친 행동을 가장 싫어하였으나, 의리에 어그러지면 한 가지 일도 하지 않았다. 평생 ‘충서(忠恕)’ 두 자에 힘쓰고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은 남에게 베풀지 않았다.

묘소와 추증

묘소는 평안도 성천 요파촌(了波村)에 있다. 권상하(權尙夏)행장(行狀)을 지었다.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대사헌(大司憲) 등에 추증(追贈)되고, 성천의 학령서원에 제향 되었다. 첫째 부인 김씨(金氏)는 동군(同郡) 김지현(金智賢)의 딸인데, 2남을 두었다. 1자는 박원순(朴元淳)이고, 2자는 박여순(朴汝淳)이다. 둘째 부인 우씨(禹氏)는 양덕(陽德)우충국(禹忠國)의 딸인데, 4남을 두었다. 1자는 박경순(朴景淳)이고, 2자는 박언순(朴彦淳)이며, 3자는 박우순(朴虞淳)이고, 4자는 박영순(朴永淳)이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지산집(芝山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