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간(大司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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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쟁(諫諍)을 담당하던 관청인 사간원의 장관(長官)으로, 당상관 정3품 관원.

개설

대사간(大司諫)은 사간원의 최고위직 관리이다. 사간원은 국정에 대한 간쟁과 왕의 정치에 대한 비평, 관원에 대한 탄핵 등의 언론을 담당하였다. 대사간은 사간원의 간언(諫言)을 조정하고, 사헌부와 협력하였다. 이를 통해 방만하게 흐를 수 있는 왕권을 견제하고, 왕권과 신권의 조화와 견제를 추구하였다.

담당 직무

대사간을 포함한 사간원 관원의 언론 활동은 크게 간쟁·탄핵·시정·인사 등으로 구분되었다. 왕을 대상으로 한 언론인 간쟁은 제도상으로는 사간원 고유의 기능이지만 사헌부·홍문관에서도 행했다. 탄핵은 관원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언론으로, 부정·비위(非違)·범법한 관원을 논란·책망하여 그 직위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었다. 시정은 그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는 정치의 시비를 논하여 바른 정치로 이끌어가는 언론이었다. 인사는 부정·부당·부적합한 인사를 막아 합리적·능동적인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언론이었다. 이를 위해 사간원 내부에서 의견의 합의를 보아 논핵하는 통간(通簡), 자신이 관련된 논핵을 피하는 피혐(避嫌) 등의 운영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사간은 조계(朝啓)·상참(常參)에 참여했고, 의정부·육조와 함께 정치와 입법에 관한 논의에 참가했다. 특히 반역 사건 등을 다루는 추국청(推鞫廳)이 열렸을 때는 대사간이 반드시 참석하여 국문해야 했다. 또 사헌부 관원과 함께 5품 이하 관인의 제수와 관련된 고신(告身)과 법령의 제정·개정과 관련된 의첩(依牒)을 심사하고 동의했는데, 이를 서경(署經)이라고 하였다. 대사간을 비롯한 사간원 관원은 춘추관(春秋館)의 사관직을 겸직하면서, 국가의 중요 기록을 보존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변천

대사간의 전신은 고려조 이래의 좌·우간의대부(左·右諫議大夫)로 볼 수 있다. 1401년(태종 1) 관제 개편 때 간의대부를 승진시켜 좌·우사간대부(左·右司諫大夫)로 하고 자급은 통정(通政)으로 삼았으며, 직문하(直門下)를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로 개칭했다.

1466년(세조 12) 1월 관제 개편 때 사간대부를 고쳐 당상관 정3품 대사간으로 하고, 지사간원사를 사간으로 하면서 『경국대전』의 관제가 갖추어졌다. 이에 따라 대사간은 조선시대 내내 간쟁(諫諍)과 봉박(封駁)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간쟁이란, 왕의 언행과 정치에 잘못이 있을 때 그것을 왕에게 이르는 것이다. 봉박은 왕이 내린 조서에서 잘못된 점이 있으면 신하가 조서를 받들지 않고, 이를 봉함하여 되돌려 주어 공박하는 일종의 거부권 행사이다.

1505년(연산군 11)에 일시적으로 사간원 정언(正言)이 혁파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다시 설치되었지만, 대사간 관직은 변함이 없었다. 이후 사간원은 변동 없이 유지되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의정부 소속의 도찰원으로 개편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박용운, 『고려시대 대간제도 연구』, 일지사, 1980.
  • 최승희, 『조선초기 언론사 연구』, 지식산업사, 2004.
  • 최이돈, 『조선중기 사림정치 구조 연구』, 일조각, 1994.
  • 구덕회, 「언론과 언관」, 『역사비평』 37, 1997.
  • 김돈, 「중종대 언관의 성격변화와 사림」, 『한국사론』 10, 1984.
  • 최승희, 「조선초기의 언관에 관한 연구: 대간제도의 성립과 그 기능의 분석」, 『한국학논집』 1,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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