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학(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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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울에 설치되어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한 사학(四學)의 하나.

개설

남학은 1411년(태종 11)에 개설된 사부학당의 하나로, 중등 교육을 위해 설치되었다. 남학에는 교수(敎授)훈도(訓導)가 배치되어 교육을 담당하였다. 유생들 중 성적 우수자는 선발되어 성균관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조선전기부터 이 기관의 교육적 성과를 높이기 위한 정책들이 시행되었다고는 하나, 그 실효성은 의문시 되고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건국 초 한성부를 오부(五部)로 편제하면서 이에 맞추어 각 부(部)에 학당을 설치하려고 하였다. 처음으로 1411년(태종 11) 한성부 남부의 성명방(誠明坊)에 남학을 설치하였다(『태종실록』 11년 6월 29일). 이후 순차적으로 1422년(세종 4)에 중학(中學)을, 1424년(세종 6)에 서학(西學)을 설치하고, 1428년(세종 10) 이전까지 동학(東學)도 설치하였으나 북학(北學)은 끝내 설치하지 못해 결국 사부학당으로 남았다. 남학을 포함한 사부학당은 유생들의 중등 교육을 위한 기관이었다.

조직 및 역할

남학을 비롯해 사부학당에는 각 학당마다 종6품의 교수 2명, 정9품의 훈도 2명씩을 두었다. 이 관직은 성균관 관원이 겸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1년 11월 16일). 그러나 1466년(세조 12) 1월 관제 개편 과정에서 겸직제를 폐지하고 전임 관원을 두게 하였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학당에서는 10살 이상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15세 이상인 유생들 중 학업이 어느 정도 성취된 사람은 시험을 거쳐 성균관에 진학하게 하였다(『태종실록』 11년 11월 16일). 그러나 남학을 포함한 학당의 교육적 성과에 대해서는 회의적인데, 이미 1421년(세종 3)부터 학당의 아이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세종실록』 3년 3월 26일).

이에 성과를 높이기 위해 1469년(예종 1) 5월에는 사부학당 유생 중 80인을 선발해서 이들을 남학에 모아 경서를 암송하는 고강(考講), 글을 짓고 쓰는 제술(製述)을 시험 보게 하는(『예종실록』 1년 5월 6일) 등 다양한 대책을 강구하였으나 여전히 교육적 성과는 미미했다.

한편 유생들에게 매 끼니 음식을 조달하기 위해 1412년(태종 12) 5월에는 학당에 토지 100결을 하사하였고(『태종실록』 12년 5월 6일), 1417년(태종 17)부터는 정부의 모든 경비를 관할하는 풍저창(豊儲倉)에서 매월 일정량을 지급하게 하였다(『태종실록』 17년 6월 20일).

변천

남학 등 사부학당의 관원은 조선후기 정원이 조정되어 영조대 간행된 『속대전』에는 종6품의 교수와 정9품의 훈도가 모두 1명씩 축소되어 올라갔다. 그리고 이 보다 이전인 1654년(효종 5)에는 김익희(金益熙)의 건의로, 국왕을 측근에서 모신 시종신(侍從臣)을 대상으로 겸교수(兼敎授)로 차출하도록 하였다. 이 겸교수 직제는 이후 숙종 초에 잠시 폐지되었다가 곧 다시 복구되어 『속대전』에 올랐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역주 경국대전-주석편』, 1986.
  • 이광린, 「선초의 사부학당」, 『역사학보』16, 역사학회, 1961.
  • 피정만, 「조선시대 성균관·사학의 유생에 관한 연구」, 『한국교육사학』3, 한국교육사연구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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