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中學)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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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중학 |
한글표제 | 중학 |
한자표제 | 中學 |
상위어 | 사부학당(四部學堂), 사학(四學) |
동의어 | 중부유학(中部儒學) |
관련어 | 남학(南學), 동학(東學), 북학(北學), 서학(西學) |
분야 | 교육·출판/교육기관/사부학당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조준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중학(中學)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연산군일기』12년 1월 22일, 『광해군일기(중초본)』 1년 11월 30일 |
조선시대에 한성부의 중부에 설치되어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립 학교.
개설
중학은 예조 속아문인 사학(四學)의 하나로, 유생들의 교육을 위해 설치되었다. 중학에는 교수와 훈도(訓導)가 배치되어 교육을 담당하였다. 중학 유생 중 성적 우수자를 선발해서 성균관에 올려 교육하게 하였다. 조선전기부터 성균관·사학·향교의 교육성과를 높이기 위한 고강(考講)이나 제술(製述) 등의 시험 제도가 운영되었으나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중학은 여타 사학과 같이 임진왜란 이후에는 유명무실한 채 존속하다가 한말 신교육이 수용되면서 소멸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중학의 전신은 고려 말에 설치된 중부유학(中部儒學)이다. 조선 개국과 함께 이를 계승해서 운영하였으나, 독립된 공간을 갖지 못하고 주로 사찰을 빌려 사용하였다[『정종실록』 2년 8월 21일]. 이후 학당의 교육 효과를 높이기 위해 독립 건물의 건립이 추진되었다. 이에 따라 1411년(태종 11)에 우선 남학(南學)이 건립되었고 이어서 1422년(세종 4)에 중부학당이 건립되었다[『세종실록』 4년 12월 12일]. 중부학당은 북부 관광방(觀光坊: 현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위치하였다. 중부학당은 1466년(세조 12) 1월 관제 개편 당시 동부·서부·남부·중부 유학의 사부유학을 동·서·남·중학의 사학으로 개칭한 조치로 중학으로 개칭되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조직 및 역할
중학에는 여타의 동·서·남학과 같이 종6품의 교수(敎授, 敎授官) 2명, 정9품의 훈도 2명씩이 배정되었다. 이들은 성균관 관원이 겸하였다[『태종실록』 11년 11월 16일]. 1466년 1월 중부유학을 중학으로 개칭하면서 겸직제를 폐지하고 전임(專任) 관원으로 차출하였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그러나 중학을 포함한 사부학당 관원에 결원이 생기는 경우가 있었고[『성종실록』 16년 4월 8일], 또는 이들을 제사의 집사(執事)로 차출하기도 하여[『성종실록』 22년 5월 22일] 중학 등 사학은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승문원과 교서관의 권지(權知) 관원들을 훈도로 차출하여 교육시키는 방안이 강구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24년 5월 5일].
중학을 비롯한 사학은 10세 이상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15세 이상이 되어 어느 정도 학업이 성취된 유생들은 시험을 쳐 성균관에 진학하게 하였다[『태종실록 』 11년 11월 16일]. 그러나 설립 초기부터 중학을 포함한 사부학당의 교육적 성과가 미미하였고, 이를 제고시키기 위한 대책으로 1469년(예종 1) 5월에는 사학 유생 중 80명을 선발해서 고강(考講)이나 제술(製述) 등 시험을 보게 하거나[『예종실록』 1년 5월 6일], 사헌부(司憲府)나 예조(禮曹)로 하여금 감찰하게 하는[『성종실록』 14년 2월 27일] 등 다양한 대책이 강구되었으나 크게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변천
중학은 1506년(연산군 12)에 원포(園圃)와 소채(蔬菜) 등을 관장하던 사포서(司圃署)가 이곳에 옮겨짐에 따라(『연산군일기』12년 1월 22일), 학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가 중종반정 이후 복구되었다[『중종실록』 1년 12월 4일]. 중학은 이후에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다가 전란 이후에 복구되었다(『광해군일기(중초본)』 1년 11월 30일).
또 중학 등 사학의 관원은 1654년(효종 5)에는 김익희(金益熙)의 건의로 왕을 측근에서 모신 시종신(侍從臣)을 겸교수(兼敎授)로 차출하도록 바뀌었으며, 중학에는 김수항(金壽恒)·이민서(李敏敍) 등이 차출되기도 하였다[『효종실록』 5년 10월 4일] [『현종개수실록』 4년 5월 21일]. 겸교수 직제는 이후 숙종 초에 잠시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곧 다시 복구되어 영조대 간행된 『속대전』에 정원이 교수와 훈도 모두 1명으로 감소되어 규정되었다. 중학을 비롯한 사학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거의 교육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유명무실하게 존속하다가 한말 신교육이 수용되면서 없어졌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한우근 외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편, 『(역주)경국대전-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 이광린, 「선초의 사부학당」, 『역사학보』16, 1961.
- 피정만, 「조선시대 성균관·사학의 유생에 관한 연구」, 『한국교육사학』3, 198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