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궐(補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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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 왕에 대한 간쟁(諫諍)을 담당하던 사관원 소속의 관직.

개설

고려부터 조선초까지 왕에 대한 간쟁을 담당하던 사간원 소속의 정5품 관직으로, 좌보궐(左補闕)과 우보궐(右補闕) 각각 1명씩 두었다. 성랑(省郎) 또는 간관(諫官)이라 부르기도 했다. 사간원의 기본적인 기능인 왕에 대한 간쟁 이외에도 사헌부 관원들과 함께 비리 인사를 탄핵하는 일 등을 담당하였다.

담당 직무

고려시대의 간관은 간쟁·봉박(封駁) 등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초 문하부(門下府)의 낭사(郎舍)는 헌납(獻納)·간쟁·박정(駁正)·차제(差除)·교지(敎旨)를 보내고 받는 일과 계(啓)·전(牋)을 소통·진달(進達)하는 등의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좌·우보궐 역시 이러한 일들을 담당하였다.

변천

고려 목종 때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의 관속으로 좌보궐과 우보궐이 설치된 이래, 문종 때 정6품직으로 규정되었다. 예종 때 사간(司諫)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보간(補諫)으로 개칭되었다. 충렬왕대에 사간·헌납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공민왕대에 사간과 헌납으로 개칭되었다가, 조선왕조에 들어와 문하부 낭사 소속의 정5품 좌보궐 1명, 우보궐 1명으로 정리되었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1401년(태종 1) 태종대의 관제 개편 때 문하부가 혁파되면서 문하부 낭사가 사간원으로 독립할 때 좌·우보궐은 사간원 좌·우헌납(左·右獻納)으로 변경되었다(『태종실록』 1년 7월 13일). 이 좌·우헌납 각 1직은 이후 1460년(세조 6)에 혁거되었다가 1466년 정5품 헌납 1직으로 복설되었고, 이후 1894년(고종 31)에 갑오개혁으로 사간원이 혁파될 때까지 그대로 계승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박용운, 『고려시대 대간 제도 연구』, 일지사, 1980.
  • 최승희, 『조선 초기 언관·언론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4.
  • 김재명, 「조선 초기의 사헌부 감찰」, 『한국사연구』 65, 1989.
  • 송춘영, 「고려 어사대에 관한 일연구」, 『대구사학』 3, 1971.
  • 이재호, 「이조 대간의 기능의 변천」, 『(부산대학교)논문집』 4, 1963.
  • 이홍렬, 「대간 제도의 법제사적 고찰: 근조(近朝) 초기를 중심으로」, 『사총』 5, 1960.
  • 최승희, 「조선 초기의 언관에 관한 연구」, 『한국학논집』 1,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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