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사(淨土寺)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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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토사 |
한글표제 | 정토사 |
한자표제 | 淨土寺 |
상위어 | 원당(願堂) |
관련어 | 의숙공주(懿淑公主), 재궁(齋宮), 삭망제(朔望祭), 정현조(鄭顯祖), 함허기화(涵虛己和)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백련산(白蓮山) |
집필자 | 이종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토사(淨土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3년 4월 6일, 『태종실록』 13년 4월 20일, 『성종실록』 18년 3월 19일, 『성종실록』 21년 10월 11일, 『연산군일기』 10년 7월 27일, 『중종실록』 32년 7월 21일, 『성종실록』 8년 12월 3일, 『명종실록』 1년 1월 6일, 『고종실록』 43년 11월 22일, 『숙종실록』 13년 6월 19일 |
세조의 딸 의숙공주의 원당으로,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백련사의 전신.
개설
조선중기까지 정토사(淨土寺)로 불리다가 현재는 백련사로 불리는 사찰이다. 조선전기 정토사가 있는 백련산 일대에서 왕이 자주 사냥을 하였다. 세조의 딸 의숙공주가 요절하자 정토사를 재궁으로 삼고 인근에 묘를 조성하였다. 명종대에 유생들이 정토사에 함부로 드나들며 소란을 피우는 사건이 발생하자 왕은 해당 유생들에게 과거 응시를 금지하는 정거 처분을 내리기도 했다. 20세기에 정토사는 백련사로 개칭되고 의숙공주의 묘는 의왕시로 이장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조선중기까지 정토사로 불렸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백련사는 747년(신라 경덕왕 6)에 진표(眞表) 율사(律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사적기에 의하면, 진표 율사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경덕왕이 국사(國師)로 삼아 삼한벽상삼중대광사(三韓壁上三重大匡師)에 봉하고 수레를 보내 궁궐로 맞이하고자 했다. 그러나 진표 율사는 궁궐에 나아가지 않았고, 경덕왕은 그의 뜻을 꺾지 못할 것을 알고 정토사(淨土寺)라는 절 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적기의 기록은 사실로 받아들기 어렵다. 진표 율사는 법상종(法相宗) 계통의 승려로서 옛 백제 땅인 금산사와 속리산 일대에서 활동했으므로 오늘날의 서울 부근에서 주석했을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2) 조선시대
정토사에 관한 본격적인 기록은 1399년(정종 1)에 함허기화(涵虛己和)가 법당과 요사를 중건한 이후이다. 정종은 상왕이 된 후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정토사에 행차하였고(『태종실록』 13년 4월 6일), 14일이 지난 후에 원주목사권완(權緩)의 집으로 갔다(『태종실록』 13년 4월 20일). 왕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 날을 머물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정토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사냥과 관련해서 정토사가 자주 등장한다. 1487년(성종 18) 3월에 성종이 정토사 산기슭에 거둥하여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고 활을 쏘는 재상들에게 "짐승 쫓는 것을 탐하여 밭곡식을 밟아 망가뜨리지는 말라."하고, 월산대군(月山大君) 소유의 정자인 망원정(望遠亭)에 거둥하여 내구마(內廐馬) 한 필을 주었다(『성종실록』 18년 3월 19일). 또 1490년(성종 21) 10월에도 왕이 정토사 아래에서 사냥하였다(『성종실록』 21년 10월 11일).
연산군대에는 지금의 연신내에서 연희동으로 길을 새로 낼 때 정토사 산 밑에서 연희궁(衍禧宮)으로 길을 내라 하고 그 길은 옛 길보다 크게 넓히라고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7월 27일). 그리고 1506년(연산군 12)에 왕이 정토사에서 사냥을 하였다[『연산군일기』 7월 25일 6번째기사]. 중종대에도 정토사에서 사냥이 있었는데 1520년(중종 15) 11월 6일, 1525년(중종 20) 10월 27일, 1536년(중종 31) 1월 12일의 기록에서 보인다. 그리고 1536년(중종 32)에는 왕릉을 옮기기 위한 도로를 닦을 때 정토사 앞을 지나는 데 민폐가 없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32년 7월 21일).
1477년(성종 8) 세조의 둘째 딸 의숙공주(懿淑公主)가 요절하자(『성종실록』 8년 12월 3일), 성종은 정토사를 재궁(齋宮)으로 삼고 인근에 묘소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명종대에 정토사에서 유생들이 함부로 드나들며 소란을 피우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명종은 보통의 절이 아니라 의숙공주의 재궁에서 함부로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유생들에게 과거 응시를 금지하는 정거(停擧)의 처분을 내렸다. 이에 대해 대신들은 정토사에서 의숙공주의 삭망제(朔望祭)를 지내는 것 자체가 잘못이고 유생들이 절에서 독서하는 것은 오랜 관행이므로 이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간언하였지만 명종은 윤허하지 않았다(『명종실록』 1년 1월 6일).
(3) 근현대
명종대 이후로는 정토사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20세기 초에 백련사라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아마도 조선후기에 정토사가 백련사로 개칭된 것 같다. 1906년(광무 10)에 이수원(李秀瑗)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왕으로부터 받은 사패지(賜牌址)가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의 묘소 경계 구역 안으로 섞여 들어간다고 소송함에 따라 조정 대신들이 철종이 즉위한 후에 용성부대부인의 묘로 가는 도로를 닦고 봉토를 하며 사방에 푯말을 세워 정계(定界)하였는데, 동쪽은 능동리(陵洞里)까지, 서쪽은 올무지(兀茂之)고개까지, 남쪽은 백련사(白蓮寺)의 동구까지, 북쪽은 홍제원(弘濟院) 숯막 뒤까지이므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고종실록』 43년 11월 22일). 이때 나오는 백련사가 바로 조선전기까지 보이는 정토사인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양주 개좌동(价佐洞)에 의숙공주묘를 조성했다고 하였고(『숙종실록』 13년 6월 19일),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주목(楊州牧) 불우조(佛宇條)에서도 양주의 서쪽 59리 지점에 백련산(白蓮山)과 의숙공주의 묘가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현재 의숙공주묘는 그의 남편인 정현조(鄭顯祖)의 묘와 함께 의왕시 초평동 왕송호수 옆에 있는데, 이는 1942년에 이장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고문헌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사찰문화연구원, 『전통사찰총서(4) 서울』, 사찰문화연구원 출판국,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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