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안역(奉安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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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기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평구도에 속한 역.

개설

고려시대에는 평구도(平丘道)에 소속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경기도의 역도(驛道)인 평구도에 속하였고, 세조대에는 경기좌도에 편입되었다. 그 뒤 조선전기의 역참 제도가 완비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서는 다시 평구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병지(兵志)」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평구도에 소속된 30개 속역 가운데 하나로 광주목에 위치하였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문종대 이후 고려의 역제(驛制)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되는 과정에서 평구도에 편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직 및 역할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 광주 조에 따르면, 봉안역에는 노비 9명과 역마 13필이 배속되었으며, 광주목 관아 동북쪽 30리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한편 1496년(연산군 2)에는 봉안역에 소속된 노비를 내수사(內需司)로 이속하도록 하였으나(『연산군일기』 2년 9월 20일), 조정 대신들의 반대로 1496년(연산군 3) 다시 내수사에 속한 비자(婢子) 20여 명을 봉안역으로 환원하였다(『연산군일기』 3년 1월 7일).

조선 태종대에는 왕이 봉안역 인근에서 사냥을 하기도 하였으며(『태종실록』 5년 2월 16일), 성종대에는 헌관(獻官)이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을 왕래할 때 이곳을 경유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4년 2월 22일).

변천

조선 건국 후 전국적으로 역도와 역로 조직이 정비되면서 봉안역은 경기도의 역도인 평구도에 소속되었다[『세종실록』 지리지 경기]. 그 뒤 1457년(세조 3)에는 이조의 건의에 따라, 한양 인근 경기도의 여러 역과 강원도 및 충청도 지역의 일부 역들을 합속해 역도를 개편하고 정역찰방(程驛察訪)을 설치하였다. 이때 봉안역은 경기좌도수참전운판관(京畿左道水站轉運判官) 겸(兼) 정역찰방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세조실록』 3년 9월 12일). 뒤이어 성종대에 『경국대전』이 반포되면서 확립된 조선시대 전기의 역도 체제에서는 다시 평구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평구도의 속역으로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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