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비(哭婢)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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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곡비 |
한글표제 | 곡비 |
한자표제 | 哭婢 |
동의어 | 통곡비(痛哭婢) |
관련어 | 국장(國葬), 반혼(返魂), 예장(禮葬) |
분야 | 사회/사회구성원/천민 |
유형 | 개념용어 |
시대 | 고려, 조선 |
집필자 | 문숙자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곡비(哭婢)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년 12월 21일, 『세종실록』 3년 2월 12일 |
국장이나 대신의 예장 때 상주를 대신하여 울어 주는 계집종.
개설
곡비(哭婢)는 상(喪)을 당했을 때 상주를 대신하여 곡(哭)을 전담하는 계집종이다. 고려조부터 국장(國葬) 때에 곡비가 있었는데, 조선조에 와서는 대신(大臣)의 예장(禮葬)에도 곡비가 등장하였다. 주로 반혼(返魂) 시에 곡비가 행렬의 앞에 서서 이끌었는데, 조선후기에는 서인(庶人)들이 이를 따라하자, 사치를 금한다는 명목으로 곡비를 규제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국장이나 대신가(大臣家)의 예장에 곡비를 쓴 이유는 장례 절차가 수개월 걸렸고, 사삿집에서는 탈상 때까지 삭망에도 곡을 했기 때문에 이를 상주가 지속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즉 곡비를 써서 곡을 그치지 않게 함으로써 죽은 조상에 대해 성의를 표한 것이다. 중국의 경우 국장에는 공주·내관들이 따라가며 곡을 했으나, 조선에서는 공주를 궁인으로 대신하고 유고(有故)한 경우 관비(官婢)를 쓰자는 논의가 있었다(『세종실록』 1년 12월 21일). 대신의 집에서는 자기 소유의 계집종 또는 타인의 계집종을 시켜 곡을 하게 하였다.
변천
태조의 국장을 치를 때 전조(前朝)부터 내려오던 제도라 칭하며 시전(市廛)의 잡색 여자들을 동원하여 울면서 따라가게 했다. 그러나 이를 통곡비(痛哭婢)라 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비판에 따라 조선 2대 왕인 정종의 장례와 태종비 원경왕후의 장례에는 궁인으로 하여금 곡을 하며 따르게 했고, 대신의 예장에는 본가의 계집종을 곡비로 쓰도록 하였다(『세종실록』 3년 2월 12일).
이후 대신이 아닌 일반 서인(庶人)들이 국장이나 대신의 예장을 따라하는 풍습이 만연하여 금제(禁制)가 여러 차례 발표되었다. 현종대에는 서인의 초상(初喪)에 신주를 끄는 가마인 향정자(香亭子)와 향정자 앞에서 이끄는 곡비(哭婢), 그리고 유밀과(油蜜果)를 쓰는 것을 금하는 내용이 포함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숙종대에도 서민들의 향정자 사용과 앞에서 인도하는 곡비의 존재 등 금법을 어기는 사례가 거론되는 것으로 보아, 곡비는 계속 하층 신분에까지 상례의 절차로서 퍼졌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김용만, 『조선시대 사노비 연구』, 집문당,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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