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승(家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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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안의 연원·가계·인물·역사 등에 관한 기록.

개설

가승은 한 집안의 가계와 인물, 역사 등에 관한 기록이다. 가계도나 족보 등의 계보를 의미하기도 하고, 현조(顯祖)를 중심으로 그들과 관련된 일화나 행장(行狀) 등을 간추려 말하기도 하며, 직계 조상의 혈통 관계를 추적한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 즉, 족보·문집·연보 등 다양한 가계 기록을 혼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승은 족보보다 일찍 발달하기 시작하여 족보와 함께 꾸준히 기록되고 후손에게 전수되었다.

내용 및 특징

가승을 한 집안 혹은 가계의 역사로 볼 수 있는 근거는, 국승(國乘)을 국사(國史) 혹은 국전(國典)으로 해석하는 데에 있다. 즉 국승이 나라의 역사 또는 규범의 뜻이라면, 가승은 가문 혹은 가계의 역사 또는 집안에서 지켜야 할 전범(典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승은 정해진 형식 없이 이를 만든 가문이나 가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작성되었다. 정재원(丁載遠)이 편찬한 『압해정씨가승(押海丁氏家乘)』에 붙인 다산정약용의 「압해가승서(押海家乘序)」에는 “선세(先世)의 사적(事蹟), 혼인한 내력, 비지(碑誌)와 행장을 수집하여 엮어서 ‘압해가승’이라 제목을 붙였다.” 하였다. 이 경우를 보면 선세의 간략한 계보와, 묘비명·행장 등과 선세 사적을 엮어 이를 가승이라 부르고 있다.

『비변사등록』의 1822년(순조 22) 8월 21일조에는 영남 유생들의 상소에 근거하여 영의정김재찬(金載瓚)이 곽재우(郭再祐)의 증직을 요청한 내용이 있다. 이때 ‘도내의 오래된 가문·세족(世族)의 가승과 야사(野史)를 거두어 모아, 그 본말을 상고’하자는 부분이 나온다. 여기서의 가승 역시 선세의 사적이나 행적 등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가승을 살펴보면 이렇게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많다. 예컨대 자신의 직계 조상 몇 대만 간략히 요약하였거나, 집안의 현조 몇 분만 이력을 정리한 경우도 있다. 아니면 정식 족보가 만들어지기 이전 형태인 가계도·계보도 형식으로 자신의 가계를 그려 넣기도 하고, 조상의 이력이나 조상이 쓴 시문 혹은 조상의 행장 등을 전사(轉寫)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양식의 기록에 표제를 가승으로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승은 대부분 필사본으로 되어 있고, 책자 형태로 정식 간행되기보다는 필요한 부분만 요약하여 지니고 다니기 편리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오래 보존되지 못하고 소멸한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족보처럼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지 못하고 한두 장의 낙장 혹은 일부 편린만으로 가승이 발견되는 경우도 많다. 가승은 최근에 가첩·보첩류 등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계보류를 포함하여 가계의 역사를 밝혀 줄 각종 기록을 망라·요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변천

고려후기부터는 간단한 계보나 가계도 등이 세가(世家)에서 활발하게 작성되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기에 등장하는 팔고조도(八高祖圖) 등의 계보도는 이러한 초기 가승류의 발달된 형태로 볼 수 있다.

이후 1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족보가 작성되면서 가승은 계보의 의미보다는 계보와 문집을 혼합한 독특한 형태로 발달하였다. 즉, 다양한 계파가 모두 수록되어 있는 족보부터, 자신의 직계 선조만을 발췌하여 기록하고 그들과 관련된 각종 행적·시문·행장 등을 모아놓은 특정 가계만의 이력까지 다양한 형태로 작성되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정약용 저; 다산학회 편, 『여유당전서보유(與猶堂全書補遺)』, 경인문화사, 1974.
  • 윤현숙, 「가승의 자료 현황과 실체 조사 연구」, 『인문과학』4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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