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지(碑誌)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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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비지 |
한글표제 | 비지 |
한자표제 | 碑誌 |
상위어 | 문체(文體) |
하위어 | 신도비(神道碑), 묘갈(墓碣), 묘표(墓表), 신도표(神道表), 묘지명(墓誌銘) |
관련어 | 묘도문자(墓道文字), 묘지명(墓誌銘), 비(碑), 지(誌), 자표(自表) |
분야 | 문화/인문학/어문학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심경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비지(碑誌)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7년 11월 20일, 『태종실록』 18년 11월 8일 |
죽은 사람을 위해 묘 앞에 세우거나 광중(壙中)에 묻는 비석에 쓰는 글을 통틀어 이르는 말.
개설
비지(碑誌)는 무덤 바깥에 세우는 ‘비(碑)’와 무덤 안에 묻는 ‘지(誌)’를 총괄하는 말이다. 지상에 세우는 묘비에는 신도비(神道碑)·묘갈(墓碣)·묘표(墓表)·신도표(神道表) 등이 있다. 고대 고관대작의 묘비는 묘 앞 도로 위에 세웠는데, 묘 앞 도로를 신도라 하므로 신도비라 하였다. 비(碑)와 갈(碣)은 제도 형식이 다르다. 비는 뿔 없는 용을 머리로 하고 거북 모양의 빗돌받침을 하며, 빗돌받침의 위로 높이 9척을 넘지 않는다. 갈은 규홀의 머리에 사각 빗돌받침으로 하며, 빗돌받침의 위로 높이 4척을 넘지 않는다. 묘표와 신도표는 신도비와 명칭만 다르지 같은 것이다. 지하에 묻는 묘지명은 지(誌)와 명(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지는 주로 산문을 사용하여 죽은 이의 성씨·본관·일생 등을 기록한다. 명은 운문을 이용하여 글 전체를 개괄한다. 이것은 죽은 이를 찬양·애도·위안하는 글이다. 묘지명은 보통 두 개의 네모난 돌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바닥으로 하고 하나는 덮개로 하여, 바닥에 지와 명을 새기고 덮개에는 표제를 새겨 묘광(墓壙) 속에 묻는다.
내용 및 특징
당송 이후로 많은 문인들은 묘주(墓主)의 악을 감추고 선을 추켜드는 유묘(諛墓)의 글을 팔았다. 『신당서(新唐書)』「한유전(韓愈傳)」의 부전(附傳)에, 한유도 묘주에게 아첨하는 유모의 글을 썼다는 내용이 나온다. 유차(劉叉)라는 문인이 한유가 묘지명의 대가로 받은 사례금을 낚아채어 가면서 "이것은 죽은 사람에게 아첨해서 얻은 것이니 제게 축수(祝壽)하는 게 낫겠습니다."라고 했다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의 비지문 자료는 매우 드물다. 「덕흥리고분묘지(德興里古墳墓誌)」,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무령왕묘지(武寧王墓誌)」와 「무령왕비묘지」 및 묘지 매매 계약서에 해당하는 매지권(買地券) 등이 이른 시기의 비지문에 속하는데, 지은이는 알 수 없다. 그밖에 고구려 사람의 묘지명으로는 천남생(泉男生)과 고자(高慈)의 묘지명 등 7편 정도가 전하고, 백제사람 부여융(扶餘隆)과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묘지명이 전하지만, 모두 중국에서 만들어져서 중국에 전한다. 낙랑의 금석문인 「위고항주치중진양남왕군묘지명(魏故恒州治中晉陽男王君墓誌銘)」 즉 「왕정묘지명(王禎墓誌銘)」 등 4편 가운데 3편에는 압운을 한 사(辭)가 포함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승려들의 경우 비를 지상에 세운 반면, 사대부의 경우에는 땅에 묻었다. 고려시대의 묘지명 가운데 지은이가 명시되어 있는 가장 오래된 묘지명은 이성미(李成美)가 지은 「이자연묘지명(李子淵墓誌銘)」이다. 이 묘지명에는 입성 ‘설(屑)’을 운자로 사용한 명(銘)이 붙어 있다.
조선의 비지는 한유의 문장을 모범으로 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후기에는 구양수와 전겸익(錢謙益)의 비지를 모범으로 한 것도 많다. 조선시대 중기의 고문가 김창협(金昌協)은 사전(史傳)은 해섬(該贍) 즉 ‘두루 아우르고 풍성함’을 위주로 하는 데 비해, 비지는 오로지 간엄(簡嚴) 즉 ‘간결하고 근엄함’을 위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생전에 자신의 비지를 직접 짓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시대 중엽에 김훤(金晅)이 자신의 묘지명을 직접 지은 것을 시작으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지식인들이 스스로 묘지명을 지었는데, 특히 정약용(丁若鏞)이 직접 지은 묘지명은 널리 알려져 있다. 또 문인 지식인들은 묘표를 직접 짓기도 했는데, 이처럼 무덤의 주인이 스스로 지은 묘표를 자표(自表)라고 한다.
변천
당나라 때는 일찍 세상을 떠난 아이나 여성을 위해 묘지(墓誌)를 짓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약간 달랐다. 고려시대 중기의 명문장가인 이규보는 1222년(고려 고종 9), 사미(沙彌)로 있던 아들이 요절하자 「상자법원광명(殤子法源壙銘)」을 짓고 석 자 목판에 새겨 광에 묻었다. 그는 또 김원례(金元義)의 부인 인씨(印氏)를 위해 묘지명을 짓기도 하였다. 「최루백처염경애묘지명(崔婁伯妻廉瓊愛墓誌銘)」과 「최윤의처김씨묘지(崔允義妻金氏墓誌)」는 남편이 부인을 위해 지은 비지이다. 이런 예는 많이 있지 않다는 점에서 특이한 예에 해당한다. 한편,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남편보다 부인이 먼저 죽었을 경우 따로 묘표를 짓지 않았다. 이색(李穡)이 지은 「김순부부모묘표(金純夫父母墓表)」는 부모의 묘표이다.
조선시대에 상민이 죽었을 때 비지를 지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19세기 초에 환관의 비갈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초의 여항 문인 임광택(林光澤)의 「환시비갈설(宦侍碑碣說)」에 따르면, 환관은 비갈의 음기(陰記)에 본생가의 부모와 세계(世系)를 적지 않고 시양(侍養) 쪽의 부모 내력을 적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두 개 이상의 비지문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례를 치른 뒤 개장(改葬)하거나 부부를 합장하는 경우, 추시(追諡)나 추증(追贈)이 이루어진 경우에는 새로 비지문을 지었다. 또 비지문을 청하는 사람과 그것을 짓는 사람 사이에 견해가 일치하지 않거나, 묘주의 후손이 최초의 비지문을 개정할 필요를 느껴 새로운 찬자(撰者)를 구한 경우에는 같은 양식의 비지문이 둘 이상 존재하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 때 이색이 지은 정릉(定陵)의 신도비를 거두고, 예문관 대제학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새로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짓게 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태종실록』 17년 11월 20일) (『태종실록』 18년 11월 8일).
참고문헌
- 심경호, 『한문산문의 미학』(수정증보), 고려대학교출판부, 2012.
- 심경호, 「朝鮮時代 墓道文字의 歷史的 特性」, 『Journal of Koren Culture』Vol.1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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