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당촌(願堂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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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으로 지정된 사찰 인근에 위치한 마을.

개설

원당(願堂)은 선조(先祖)의 명복을 빌고 일족(一族)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왕실이나 특정 집안에서 창건한 사찰을 통칭하는 말이다. 원찰(願刹)이라고도 하는데, 선조의 초상화를 봉안한 진전(眞殿)을 중심으로 말할 때 원당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일찍이 신라 때부터 존재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원당의 운영이 당연시되어 수많은 법회와 의례 등이 이곳에서 설행되었다. 궁궐 안에 건립한 원당은 내원당(內願堂), 내불당(內佛堂)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의 원당은 왕실의 신앙 의지에 따라 그 흥폐가 좌우되었다. 내원당은 태조 때부터 건립되었는데, 태종 이후 설치와 폐지가 반복되었다. 세종대에는 유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원당에서 5일간 경찬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흥천사(興天寺) , 연경사(衍慶寺), 개경사(開慶寺), 봉은사(奉恩寺) 등은 왕릉 가까이에 건립되었는데, 이 사찰들은 재궁(齋宮), 능침사(陵寢寺), 조포사(造泡寺) 등으로 불리며 주로 제사 의식을 담당하였다. 조포사란 제사에 올리는 두부를 만드는 절이라는 뜻이다. 조포사 인근의 원당촌은 두부를 비롯한 제사 음식을 만드는 주요 거점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어 대상재(大祥齋)와 같은 왕실의 기신재(忌晨齋)가 개최되면 의식이 끝난 뒤 음식을 베푸는 반승(飯僧)을 행하였는데, 세종대에는 무려 승려 8,000~9,000명과 구경꾼 10,000명이 운집했다고 한다(『세종실록』 28년 3월 29일). 원당촌은 이러한 재(齋)와 반승에 필요한 음식 등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변천

명종 연간에는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 조처로 전국에 많은 원당이 생겨났다. 원당이 건립되면 인근의 마을에는 원당의 유지 및 관리에 필요한 비용에 충당하도록 전답이나 면세지가 지급되었다. 이 마을을 원당촌이라 불렀다. 원당촌은 사찰의 면세지를 기반으로 관청의 보호를 받으며 특권을 누렸는데, 그로 인한 폐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1795년(정조 19)에는 호남암행어사 정만석(鄭晩錫)이 서계(書啓)를 올려, 호남에는 고을마다 원당촌이 있는데 관청이나 향청(鄕廳)에 소속되어 돈을 바치고 온 마을이 부역을 면제 받고 있으므로 이를 일체 혁파할 것을 건의하였다(『정조실록』 19년 5월 22일).

참고문헌

  • 이기운, 「조선시대 내원당의 설치와 철폐」, 『한국불교학』29, 한국불교학회, 2001.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하종목, 「조선초기 사원경제-국가 및 왕실 관련 사원을 중심으로」, 『대구사학』60, 대구사학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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