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직(影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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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만 있고 특별한 직무가 없는 관직.

개설

고려시대에 녹봉을 받던 유급산직(有給散職)을 혁파하고 그에 대체하기 위해 조선 초 세종대에 설치되었다. 근무 연한을 마치고도 옮길 자리가 부족하여 다른 관직으로 승진할 수 없는 사만거관인(仕滿去官人)이 스스로 원하면 영직(影職)에 제수하였다. 일시적으로나마 사만거관인에게 활로를 열어주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관직 체계인 것이다. 때로는 정병(正兵)과 같이 관직 연한이 만기된 후 의례히 영직이 제수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영직은 이전에 유급산직이 주어지던 문무 경관직을 비롯해 경아전에게 제수되었으며, 정원은 없었다. 신분적으로도 양반뿐 아니라 경아전이나 조군(漕軍)·수군(水軍) 등 천민을 제외한 양인 모두에게 주어졌다. 이 밖에도 왜인이나 제주도인을 비롯해 각사 이전(吏典), 성중관(成衆官)평로위(平虜衛) 군사들에게 제수하기도 하였다.

특별한 목적하에 영직이 제수되는 경우도 있었다. 1445년(세종 27)에는 군사의 육성을 위해 건장한 자 100명을 선발해서 이들에게 5품~9품까지 영직 체아를 주었다. 또한 이들에게 화포를 익히게 하고 왕이 거둥할 때에는 어가(御駕) 뒤에서 호위하게 하였다.

영직을 받는 자에게는 녹봉이나 과전(科田)이 지급되지 않았으며, 이들은 조회(朝會)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영직도 관직이었으므로 명목상이나마 관원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일정한 시험을 거쳐 실직(實職) 또는 무록관(無祿官)으로 진출할 수도 있었다.

변천

16세기 중반 이후 영직은 국가의 재정 확보를 위한 방안으로 활용되었다. 국가에 곡물을 바친[納粟] 사람에게 영직을 제수하기도 하였고(『명종실록』 11년 6월 28일), 특히 임진왜란 중에는 군량 확보 방안으로 영직 임명장[告身]이 발급되기도 하였다. 성혼(成渾)은 군량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일정량 이상의 곡식을 납부하는 자 가운데 양역(良役)을 부담하는 백성들에게 영직 4품을 주고, 사족은 영직 3품을 주자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인조대 제정된 호패사목(號牌事目)에서는 실직 관원과 영직 관원을 구별하여 이문학관(吏文學官) 및 계사(計士)·사자관(寫字官)·화원(畵員) 등과 함께 소목방패(小木方牌)를 사용하도록 규정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우계집(牛溪集)』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이성무, 『조선초기 양반연구』, 일조각, 1980.
  • 한우근, 「조선초기 이후의 검직과 영직-「훈관 검교고」보유-」, 『진단학보』 71·72,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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