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혈사(神穴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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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삼각산에 있는 진관사의 전신.

개설

신라 때 원효가 창건하면서 신혈사(神穴寺)라고 이름했다고 전한다. 『사적(事蹟)』에는 고려 현종 때 크게 중창하고 진관사(津寬寺)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였으나, 『고려사』에는 이후 계속해서 신혈사로 기록하고 있고 진관사의 명칭은 조선 태조때부터 등장한다. 조선 태조 때 수륙도량(水陸道場)으로, 태종 때 자은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었다. 조선후기에도 여러 차례 중건, 중수하였다. 6·25전쟁 때 소실된 절을 최진관(崔眞觀)이 1964년부터 중건하기 시작했고 이후 비구니 수행도량이 되었다. 1977년부터 수륙재를 복원하기 시작해 윤년마다 수륙재를 봉행하였고, 2013년 진관사수륙재(津寬寺水陸齋)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북한지(北漢誌)』에 의하면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신혈사라 했다고 한다. 고려 성종 때 여철(如哲)이 창건했다고도 한다. 이후 현종(顯宗) 때 크게 중창하였다. 현종은 즉위하기 전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있을 때 신혈사에 몸을 피해 있었는데,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신혈사 승 진관(津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절을 중창하고 이름을 진관사(津寬寺)로 바꾸었다고 『사적(事蹟)』에는 전한다. 신혈사의 중창 불사는 1011년(현종 2) 가을에 시작해 1012년 가을에 준공을 보았다. 당시 대웅전이 사방 10칸, 동·서 승당이 각 30칸, 청풍당(淸風堂)과 명월료(明月寮)가 각 10칸, 제운루, 정재소, 일주문, 해탈문, 종각, 창고 등 상당한 규모로 건립되었다. 이후 신혈사는 왕실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었다. 1090년(선종 7) 10월 선종이 행차하여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봉행했고, 1099년(숙종 4) 10월에 숙종이 친행하였고, 1110년(예종 5) 10월에는 예종이 순행하여 참배했다.

(2) 조선전기

조선시대에 진관사는 무엇보다 수륙재(水陸齋)를 설행하는 도량으로 명성을 떨쳤고, 한양 근교의 4대 사찰(불암사, 진관사, 삼막사, 심원사) 중 하나로 꼽혔다.

태조이성계는 서울 인근에서 수륙재를 열기에 적합한 곳으로 진관사를 선정하여 총 56칸의 수륙사(水陸社)를 조성하고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열었다(『태조실록』 7년 1월 6일). 조종(朝宗)의 명복을 빌고 중생을 복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1407년(태종 7) 12월, 양주(楊州) 신혈사(神穴寺)가 자은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이때 진관사도 수륙도량으로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신혈사와 진관사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진관사에 신혈사 터가 있다고 한 기록 등으로 보아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 11개(혹은 12개) 종파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진관사는 자은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고려 현종 때 중창된 이후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한 신혈사(진관사)는 조선초에 수륙도량으로, 자복사찰로 지정된 한양 근교의 명찰이었다. 1414년(태종 14) 나라에서 매년 1월 15일에 정기적으로 수륙재를 거행하도록 결정하였고(『태종실록』 14년 2월 6일),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거행하기도 했다(『태종실록』 18년 3월 3일).

세종 때는 왕실의 각종 재(齋)를 봉행하였는가 하면, 선종(禪宗) 18사에 소속되어 사사전 외에 수륙위전(水陸位田) 100결을 따로 지급받았고(『세종실록』 6년 4월 5일), 절을 수리하여 수륙재가 지속적으로 거행될 수 있도록 하였다(『세종실록』 32년 2월 5일). 문종 때는 대대적인 중창 불사를 하였으며 수륙사(水陸社)를 중건하였다(『문종실록』 1년 5월 18일). 1463년(세조 9)에 화재로 가람 일부가 소실되어 피해를 입었으나, 1470년(성종 1) 벽운(碧雲)이 다시 중건했다.

(3) 조선후기

1854년(철종 5)과 1858년(철종 9)에 절을 중수하였고, 1879년(고종 16)에는 경운(慶雲), 탄경(呑鏡) 등이 큰 방 34칸을 지어 대가람을 형성하게 되었다.

(4) 근현대

1908년 송암(松庵)이 5층석탑을 조성하였고, 1910년 경운(慶雲)이 대대적인 중창 불사를 하였다. 경운은 대웅전 삼존상을 개금하고, 명부전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시왕탱화 등을 개금 보수하였고, 독성전과 칠성각을 신축하는 등 근대기 진관사 중창주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1950년 6·25전쟁 때 나한전, 독성전, 칠성각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20세기 초까지 거행돼오던 수륙재도 전쟁을 겪으면서 중단되었다. 폐허가 된 절을 비구니 최진관(崔眞觀)의 발원으로 1964년부터 건물을 차례로 재건하기 시작했고, 이후 비구니의 수행도량이 되었다. 1965년 대웅전을 비롯하여 1968년 명부전, 1970년 일주문과 동별당, 1972년 나가원, 1975년 동정각 등을 신축하여 옛 가람의 면모를 복원하게 되었다.

1977년부터 자운, 진관이 수륙재를 본격적으로 복원하기 시작해 진관사수륙재보존회가 주축이 되어 매 윤년 윤달에 수륙재를 봉행하였다. 2013년 12월 진관사수륙재(津寬寺水陸齋)가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126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진관사는 부설 기관으로 1996년 설립한 코끼리유치원, 2007년 설립한 사회복지법인 진관무위원, 진관지역아동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다.

문화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나한전의 석가삼존불상(釋迦三尊佛像, 제143호)·16나한상(十六羅漢像, 제144호)·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제145호)·16나한도(十六羅漢圖, 제146호), 칠성각의 칠성도(七星圖, 제147호)·영정(影幀, 제148호), 독성각의 산신도(山神圖, 제149호) 등이 있다.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칠성각의 석불좌상(石佛坐像, 제10호), 독성각의 나반존자상(那般尊者像, 제11호)·독성도(獨聖圖, 제12호)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양촌집(陽村集)』
  • 『북한지(北漢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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