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홍(續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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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산군 때, 중앙 및 지방의 귀족들이 사적으로 육성한 음악 전문 여종을 궁궐로 뽑아 들여 새롭게 부르도록 한 명칭.

개설

연산군은 귀족들이 개인적으로 육성한 음악 전문 여종[解音婢]을 빼앗아 궁궐에 들이고 속홍(續紅)이라 부르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10월 9일). 속홍에게는 특별히 음악 교육을 더 시키고 각종 물품을 지원하였으며, 그 가족들의 역(役)까지 감해주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하였다.

내용 및 특징

1505년(연산군 11)에 연산군은 귀족들이 소유한 음악 전문 여종을 빼앗아 궁중에 들이고 국가에 소속시켰다. 처음에는 속홍의 궁중 거처를 덕종(德宗)의 원묘(原廟)연은전(延恩殿)에 두었는데, 이곳을 회사각(會絲閣)이라고 이름 붙였다(『연산군일기』 11년 11월 12일). 또 속홍의 음악 교육은 장악원(掌樂院)의 후신인 연방원(聯芳院)의 관원이 감독하는 가운데, 총률(摠律)과 광희(廣熙) 등이 맡아보도록 하였다. 속홍으로 뽑힌 자들은 연산군 말기의 각종 연회와 놀이에 참여하여 주로 음악 연주를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산군은 속홍을 상당히 우대하였는데, 속홍의 일족에게는 면천(免賤)의 기회를 주었다. 또 속홍이 주접(住接)하고 있는 집[接家]과 그 본가(本家)의 사람들은 일체의 잡역을 면제해주고, 오직 속홍을 위해 의복을 빨고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등의 일에 힘쓰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2년 2월 10일). 필요한 물품도 국가에서 지원하도록 하였다(『연산군일기』 12년 5월 24일).

한편, 만일 속홍의 치장이 정결하지 못하면 이를 검찰하지 못한 연방원의 관원을 국문하게 하였다. 또 속홍을 포함해 흥청(興淸)과 운평(運平) 등의 신분으로서 항상 화장하고 있지 않은 자는 죄를 주되 남쪽 사람은 북쪽, 북쪽 사람은 남쪽으로 분배(分配)시키고, 그 부모까지 벌하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2년 4월 1일).

변천

연산군은 1505년 10월 9일에 처음으로 속홍을 두었다. 이듬해 3월 25일에는 종친이자 이복형제인 이돈(李惇)의 집에 채홍·속홍을 두고 이들을 부화악(赴和樂)이라 부르게 하였으며(『연산군일기』 12년 3월 25일), 3월 27일에는 채홍·속홍을 뽑아 들이고 그 거처를 취춘원(翠春院)이라고 하였다(『연산군일기』 12년 3월 27일). 이후 반정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중종은 공천(公賤)에 속하는 기녀들은 각 지방으로 돌려보내고, 속홍과 같은 사천(私賤)은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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