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斜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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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각사에 속한 노비들을 본래 소속되어 있던 곳에서 빼내어 다른 관서에 소속시키는 것.

개설

사부는 노비의 입장에서 고된 역을 피하고자 할 때, 합법적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속대전』「형전(刑典)」공천(公賤) 조에는 중앙 각사의 노비 중에 일이 고된 곳을 피하여 힘이 덜 드는 곳으로 가는 자, 관리 중 노비를 사사로운 부탁에 따라 제멋대로 옮겨 준 자는 모두 군적(軍籍)을 제멋대로 옮겨 주는 율에 의거하여 장(杖) 100대, 도(徒) 3년에 처하였다. 또한 양곡[米糆]을 관장하는 관서의 노비는 사부와 투속(投屬)을 허용하지 않도록 규정하였다.

한편, 사환을 잃은 중앙 각사는 사주인(私主人)을 통해서 이를 보충하고, 사주인은 이를 통해 방납(防納)을 정당화시켰다.

내용 및 특징

사부의 원인에 대해서는 1487년(성종 18) 대사간김수손(金首孫)의 상소문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성종실록』 18년 1월 23일). 그는 각사노비(各司奴婢)가 줄어드는 것을 지적하면서 장흥고(長興庫)의 경우를 예로 들어 그 원인을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장흥고 소유의 노비는 모두 115명으로서 여러 관서 가운데 가장 노비가 넉넉한 편이었다. 실제로 『경국대전』에 장흥고 소유의 노비 정액은 차비노(差備奴) 14명, 근수노(跟隨奴) 2명이었다. 16명이 늘 입역(入役)하는 인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115명을 모두 7번으로 나눈다 하여도 1번당 15명을 입역할 수 있는데, 그중에는 서울에 사는 노비도 있었을 것이므로 그 넉넉한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15명 가운데 실제로 입역하는 자는 남자 종인 노(奴) 8~9명, 여자 종인 비(婢) 10여 명에 지나지 않아서 일을 제대로 감당해 내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김수손은 그 원인을 9가지로 들었다. 즉, 115명 가운데 ①) 수복(守僕)이 된 자가 2명, ② 각 색장(色掌)이 된 자가 3명, ③ 별감(別監)이 된 자가 5명, ④ 구사(丘史)가 되고 공신노(功臣奴)가 된 자가 6명, ⑤ 장인(匠人)·악공(樂工)·가동(歌童)·잠실고지기[蠶室庫直]가 된 자가 43명, ⑥ 조라치[照刺赤]·잠모(蠶母)·방자(房子)·무수리[水賜]가 된 자가 10명, ⑦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국역(國役)을 면제받는 시정(侍丁)이 된 자가 6명, ⑧ 양인(良人)이 된[從良] 자가 10명, ⑨ 도망하여 거지가 된 자가 10명 등 모두 92명이 장흥고의 입역 대상에서 빠져 버렸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 결과 지금 현역 노가 8~9명이고, 비가 1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기서 ①~⑥의 69명은 모두 다른 관서에 예속되어 있는 사부한 경우였다. 즉, 사부한 노비가 전체 노비의 절반을 넘었던 것이다.

사부 현상은 1499년(연산군 5)에도 지적되고 있었다. 사온서(司醞署)의 경우 원 노비는 28명인데 사부자가 25명이라 남은 노비는 3명밖에 없다고 하였다. 또한 사재감(司宰監)의 경우 원래는 노비가 57명인데 사부자가 48명이라 남은 노비는 9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하였다. 이때 이들 관서뿐만 아니라 다른 관서의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중종대에도 사부가 각사노비의 줄어드는 원인이 된다는 지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로 인해 성균관·사학(四學)·봉상시(奉常寺)의 노비들을 다른 관서에 소속시키는 것은 금지하였다.

변천

조선후기에는 이러한 사부가 왕실 궁방에서도 자행되어, 각사노비를 사부하여 왕실 내정(內庭)의 역에 충당하는 사례가 문제시되기도 하였다[ 『효종실록』 즉위년 12월 9일 1번째기사].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역사비평사, 2010.
  • 지승종, 『조선 전기 노비 신분 연구』, 일조각,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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