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지도(北關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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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철령관(鐵嶺關) 이북(以北)의 함경도 지역을 그린 지도.

개설

함경도는 철령관 북쪽 땅이라는 의미에서 관북(關北)이라 하였다. 이 지역이 관방(關防)에서 중요하게 부각된 이유는 관북 지역의 지정학적 위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관북 지역은 고려 때 윤관이 이민족을 정벌하였으나, 조선초기까지 여진족과의 경계가 모호했다. 조선 건국 후 태조이성계는 관북 지역이 조선왕조의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하여 함경도에 산재한 능을 조사시키고, 그 지역의 도읍을 정리하도록 하였다. 이를 계기로 관북 지역에 대한 조정의 관심도 고조되었다. 이후 세종은 김종서를 보내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해 함경도 서북 방면의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 등 압록강 상류에 사군(四郡)을 개척했고(『세종실록』 19년 1월 4일), 동북 방면의 종성(鐘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 등 두만강 하류 남안에 육진(六鎭)을 설치함으로써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확정하였다.

1466년(세조 12) 이래 고종대까지 함길도와 평안도에 정6품 외관직인 병마평사(兵馬評事) 곧 북평사를 각각 1명씩 파견하여 지역의 병마절도사를 도와 개시(開市), 도내 순행과 군사훈련, 무기 제작, 군장 점검, 군사시설 수축 등의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함경도의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실시했던 북도(北道) 도과(道科)는 고종대까지 지속되었는데, 육진과 북읍(北邑)을 중심으로 인재를 뽑았다(『고종실록』 12년 10월 3일).

변천

현종대에 남구만이 북평사로 북관의 변방을 순찰하고 그린 지도를 바치자, 현종은 무산(茂山) 등 북쪽에 진보(鎭堡) 세 곳을 설치하고 서쪽에 후주(厚州)를 설치하게 하였다.

북관 지역 지도에 대한 기록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은 1679년(숙종 5)에 청나라 차사원이 보여준 지도에 대한 논의였다. 당시 청에서 온 차사원이 부령부사최양필에게 백두산과 장백산, 두 산의 형세를 물으며 지도를 보여준 일이 있었다. 그 지도를 본 최양필의 보고에 의하면, 지도는 조선의 장지(壯紙) 한 폭 크기로, 대개 평안도청천강(淸川江) 북쪽 여러 고을, 북관의 임시 군영과 육진, 그리고 삼수(三水)·갑산(甲山)에서 영흥부(永興府) 경계 끝까지 모든 고을과 산천이 완연히 그려져 있고, 청나라의 오국성(五國城)·여진(女眞)·걸가퇴·문암(門巖) 등지도 그 속에 그려져 있었다(『숙종실록』 5년 12월 12일). 이는 조선뿐만 아니라 청에서도 이 시기 조선과의 국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음을 시사한다.

남구만이 1683년(숙종 9)에 병조 판서에 임명된 이후 자성(慈城) 등지에 변장(邊將)을 설치하도록 청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 겨우 설치하였다가 도로 혁파하곤 하였다. 1685년(숙종 11)에 조선인들이 채삼(採蔘)을 위해 청나라 국경을 넘는 범월 사건이 발생하여 무산과 후주의 혁파 논의 끝에 결국 후주는 혁파되었고, 무산만 남았다. 이에 남구만은 심양(瀋陽)에서 영고탑(寧古塔)으로 가려면 길이 매우 험하고 멀지만, 만약 조선의 서북(西北) 변경을 거쳐서 간다면 매우 가깝기 때문에 청나라에서 만약 급박한 변고가 있어 옛날에 살던 땅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면 틀림없이 지름길로 나아갈 것이고, 이 경우 조선의 서북 변경을 짓밟으려 할 것이므로 조정에서는 더욱 유의하여 이에 대비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에 대한 자료로 청나라의 『성경지(盛京志)』 중에 기재된 작은 지도를 확대하여 큰 폭으로 만들어 도로와 고을을 표시하고 산천(山川)·주현(州縣)·참로(站路)의 이름을 갖추어 기재하였으며, 지도에 덧붙여 역대의 연혁과 당시에 설치된 관청을 대략 기록하여 두루마리로 제작하였다(『숙종실록』 23년 5월 18일). 숙종대의 이러한 의론은 조선후기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도」와 같은 관방지도의 본격적 제작에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영조대까지도 이 지역에서 발생할 수도 있는 변란에 대비하기 위해 지략 있는 인재를 뽑아 관북 지역의 감사와 수령으로 차송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영조실록』 1년 11월 24일).

1741년(영조 17)에는 함경감사민형수가 북관지도를 그려 와 일부 지역의 변장 및 진보 설치에 대해 보고하였다(『영조실록』 17년 7월 1일).

현존 관북지도

현존하는 관북지도는 대부분 숙종 및 영조 연간에 제작된 것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관북지도」는 길주·명천·경성·부령·무산·회령·종성·온성·경원·경흥 등의 지형과 성곽·도로 등을 채색으로 구분하고, 성주(城周)·원전(元田)·민호(民戶) 등과 군사 관계 및 각 진(鎭)의 수비 상태 등을 간략하게 기입하였다. 이 밖에 함관령(咸關嶺)에서 돌장령, 마운령(摩雲嶺)에서 신동령(新洞嶺)에 이르는 여러 고개의 거리를 밝힌 것과 마천령(摩天嶺)에서 사곡령(沙哭嶺) 중로(中路)까지의 여러 길을 밝힌 지도가 곁들여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북관지도(함경도전도)」는 18세기 중반 제작된 지도로, 함경도 전도와 군현 지도를 엮은 지도집이다. 함경도 전체와 함경남도·함경북도 3매, 그리고 18개의 고을 지도가 5책으로 구성된 지도책이다. 이 지도책이 만들어질 당시에 함경도의 고을 수는 총 23개였는데, 갑산·단천(端川)·북청(北靑)·삼수·이성(利城)의 지도가 누락되어 있다. 함경도 전체와 함경남도·함경북도 3매는 5책에 엮어져 있으며, 표지에는 ‘관북지도(北關地圖)’라고 쓰여 있다. 지도 중 이름이 없는 3점의 지도는 이해의 편의를 위해 함경도지도·함경남도지도·함경북도지도라는 이름을 붙였다. 함경도지도는 대형 지도인데, 산맥·수계(水系)·군·현·진보·교통로가 표시되어 있다. 전도와 군현도에는 지도의 여백에 민호·전결(田結)·군병(軍兵)·봉군(烽軍)·망해군(望海軍)의 총수가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박현모, 「세종의 변경관과 북방영토경영 연구」, 『정치사상연구』, 한국정치사상학회, 2007.
  • 배우성, 「17·18세기 청에 대한 인식과 북방영토의식의 변화」, 『한국사연구』 99·100, 1997.
  • 심경호, 「관서·관북 지역의 인문지리학적 의의와 문학」, 『한국고전연구』 24, 한국고전연구학회,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