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과(道科)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왕이 지방민을 위로하기 위하여 각 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특별히 시행하는 과거.

개설

지방민을 위한 과거는 1469년(세조 6) 세조가 평양별시를 시행한 것이 효시였다. 온양·고성·개성·전주·수원 등지에서 실시되던 것이 1643년(인조 21)에 시행한 관서별시를 시작으로 함경도·평안도에서 별시를 실시하면서 도과라고 불리게 되었다. 중앙에서 중신을 시험관으로 파견하여 실시하는데 초시는 설행하지 않았다.

내용 및 특징

외방별시·외방정시·도과는 지방민만을 위한 시험이었다. 1469년(세조 6) 세조가 평양에 가서 별시를 시행한 것이 효시가 되었다. 세조는 1464년(세조 10)과 1468년 두 차례에 걸쳐 온양에 행차하고 별시를 시행하였고, 1466년 고성에서도 별시를 시행하였다.

그 후 여주·개성·용만·전주 등 특정 군현에서 실시하던 별시가 도민을 대상으로 하는 도과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은 1643년의 관서별시(關西別試)가 처음이었다. 관서별시는 병자호란의 참화에 군량미 운반 등의 노역에 고생한 관서 지방 사람들을 위로하고 보상하기 위하여 실시한 것이었다.

도과는 17세기 이후 주로 평안도와 함경도에 실시되었다. 관서·관북 지방은 국방상 중요한 지역으로 민심을 위열하는 차원에서 왕의 특령으로 도과를 설행하였다. 도과는 별시·별과로도 지칭되었으며, 『속대전』에서 외방별과(外方別科)로 정비되었다. 『속대전』에 의하면 평안도·함경도·강화·제주 등지에는 왕의 특지가 있어야 설행하였다. 실시 방법은 중신을 파견하여 지방 인재들에게 과거를 치르고 그곳에서 합격자를 발표하는 경우와 어사를 보내어 시권(試券)을 거두어 서울로 보내 대제학이 고열(考閱)하는 경우가 있었다. 고시 과목은 증광전시와 같았다.

현종대에는 함경도 도과(1664년)와 평안도 도과(1669)가 5년 간격을 두고 설행되었으나 1717년(숙종 43)에는 같은 해에 함경도와 평안도에 도과를 설행하였다. 이후 1746년(영조 22)과 1774년(영조 50)에 같은 해에 설행되었고, 정조와 순조 연간에도 같은 해에 설행되었다. 순조대에는 도과를 10년마다 실시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순조실록』 25년 7월 25일). 순조 이후에는 양도의 도과가 같은 해에 실시된 적은 없었다.

같은 해에 설행한 1746년의 경우 4월에 평안도의 도과를 설행하여 5명을 뽑았고(『영조실록』 22년 4월 8일), 8월에 함경도에 도과를 설행하여 4명을 뽑았다(『영조실록』 22년 8월 18일). 4~5명을 뽑을 때에 등제는 갑과 1명, 을과 1명, 그 외 인원은 병과에 등제하였다.

도과에는 문과와 무과가 설행되는데 선발 인원에 차이가 많이 났다. 1815년 관서·관북 도과의 문과에서는 각 6명씩을 뽑은 데 비하여 무과는 관북에서 367명, 관서에서 339명을 뽑았다(『순조실록』 15년 8월 6일)[『순조실록』 12월 9일 1번째기사]. 1826년의 관서 도과에서는 문과에 6명, 무과에 99명을 뽑았고, 관북의 도과에서는 문과에 4명, 무과에 241명을 뽑았다(『순조실록』 26년 10월 24일)[『순조실록』 10월 28일 2번째기사]

북도의 문과 정원 6명은 영조대에 마련된 『등록(謄錄)』에 의하면 남관(南關)과 북관(北關)에서 각각 3명씩 6명을 뽑았다. 북관 3명은 육진(六鎭)과 북읍(北邑)에서 각각 1명씩 뽑고, 나머지 1명은 육진과 북읍에 구애받지 않고 문장으로 뽑았던 것이었다. 1875년(고종 12)에 도과 문과의 절목(節目)을 마련할 때 그대로 적용하였다(『고종실록』 12년 10월 3일).

합격자 발표 후에 유가(遊街)를 하듯 평안도 도과에 합격한 사람들을 위해서 대동강에서의 유람을 하사하는 것이 규례였다(『정조실록』 6년 10월 22일).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최진옥, 『조선시대 생원 진사 연구』, 집문당, 1998.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people.aks.ac.kr/index.aks.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