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가곡(名稱歌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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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부처나 보살의 이름을 모아 음률에 비(比)한 것.

개설

「명칭가곡(名稱歌曲)」은 『조선왕조실록』에 「가곡(歌曲)」이라는 명칭으로도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초기인 태종대와 세종대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 그러나 세종대 이후 「명칭가곡」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지 않으며, 현재는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내용 및 특징

「명칭가곡」은 여러 부처나 보살의 이름을 모아 음률에 올린 것으로, 중국의 명나라 영락제에 의해 조선에 들어온 것이다. 영락제는 이 곡을 주변 여러 나라에 보냈는데, 이것이 조선에 처음 들어온 시기는 1417년(태종 17)이다.

「명칭가곡」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만 볼 수 있다. 1417년부터 1434년(세종 16)까지 18년 동안 총 17회 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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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가곡」에 관한 기록은 1417년부터 1420년까지 4년 동안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이 시기는 영락제의 재위 기간과 맞물린다. 1434년 이후에는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즉 영락제가 1417년에 조선에 「명칭가곡」을 보낸 후, 다음 황제인 선종이 1434년에 「명칭가곡」을 보낸 기록을 끝으로 이 곡은 더 이상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조선왕조의 불교 억압정책이 계속되면서 영락제와 그 유훈을 받든 신종이 죽은 후에 더 이상 「명칭가곡」에 대한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에 적지 않은 것이거나, 신종 이후에는 중국에서도 「명칭가곡」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선종이 「명칭가곡」을 보낸 것은 영락제의 유훈에 따라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에는 중국에서 보냈다는 기록도, 조선에서 받았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조선에 들어온 「명칭가곡」이 전국적으로 불렸는지, 아니면 단지 형식적인 배포에 그쳤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불렸다면 그 실체는 무엇으로 남아있는지에 관해서도 현재까지 연구된 바 없다.

「명칭가곡」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명칭가곡」을 받았다는 기록(2, 4, 14), 「명칭가곡」을 받은 것을 사례하는 기록(3, 6, 15), 「명칭가곡」을 부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록(5, 9, 10, 12, 13), 왕이 「명칭가곡」을 반포하거나 부르도록 명한 기록(1, 7, 8, 11, 13, 17)이다.

먼저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명칭가곡」을 보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1418년(태종 18) 5월 19일 기록(2번), 1418년(세종 즉위) 9월 4일 기록(4번), 1419년(세종 1) 12월 18일 기록(14번)으로 모두 3회이다. 그러나 1417년(태종 17) 12월 20일 기록(1번)과 1434년(세종 16) 5월 25일 기록(17번)은 언제 들어온 「명칭가곡」인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1429년 12월에 받아온 「명칭가곡」(14번)이 1420년 2년 4월에 반포된 것(16번)으로 보아, 1번의 경우는 1417년 12월 이전에, 그리고 18번은 1434년 5월 이전에 조선으로 보낸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명나라에서 조선에 「명칭가곡」을 보낸 횟수는 모두 5회임을 알 수 있다.

조선에 반입된 「명칭가곡」의 양도 상당히 많았다. 처음 들어온 「명칭가곡」과 『음즐서』의 양은 확인할 수 없지만, 두 번째는 「보살여래가곡」 3백본, 세 번째는 「명칭가곡」 1천본, 네 번째는 『음즐서』 22궤와 「명칭가곡」 30궤, 다섯 번째는 『음즐서』 441벌(件)과 「명칭가곡」 135벌(件)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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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에서 보낸 「명칭가곡」을 조선에서 배포한 대상은 대개는 각종 사사(寺社)와 경대부들이었다. 1419년에 승려들의 변고, 즉 일부 승려들이 사찰 개혁에 불만을 품고 중국으로 건너간 사건이 있은 후에, 이 일을 논의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명칭가곡」을 잘 받들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중국의 사신이 오가는 곳에 중과 늙은이를 모아 「명칭가곡」과 음즐을 외우도록 했다. 또 기생들에게도 그것을 가르쳤다(12번). 이것은 「명칭가곡」을 배포하고 전국에 퍼뜨릴 뜻이 없었던 조선의 지배층이,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시행한 정책으로 보인다.

궁중에서도 「명칭가곡」이 연주되었다. 1418년 8월에 속악과 함께 연주할 것을 김점이 청하자 세종은 이것을 윤허하지 않았다가 9월 4일에 사신이 왔을 때 명하여 교주하게 하였다(4, 5번). 같은 해 12월에 상왕이 맹사성에게 명하여 「명칭가곡」의 음률을 진작에 합하는 것으로 뽑아서 공인과 기생으로 하여금 익히게 하였다(7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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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가곡」의 실체나 변천에 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어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속악인 「진작」에 의거하여 음률과 곡조를 올리게 하고 악공과 기생들에게 익히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명칭가곡」이 궁중의 연향에서 불렸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명칭가곡」은 사신의 행렬이 지나가는 연도에서 불렸으며, 그 내용은 부처의 명호를 염송하는 것인데,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전승되었던 「산염불」과 「자진산염불」은 후렴구 사설에서 ‘아미타불’의 명호를 쓰고 있고, 개성의 산염불은 ‘불상 오십삼불’이 나온다. 경기와 서도의 산타령에는 없지만 이것의 영향을 받아 생성되었다고 보는 남도 선소리 보렴에서는 역시 아미타불이 거론되고 있다. 따라서 ‘명칭가곡’의 사설 내용은 확인할 수 없으나, 궁중에서 음률에 올려 연주한 것과는 다른 형태로 승려와 노인들에게 암송하도록 하였으며, 그것의 조그만 편린이 산염불과 선소리에 남아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 외에 1449년(세종 31)의 ‘신제곡(新制曲)’에 관한 기록과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의 민악의 가사 등으로 볼 때 「명칭가곡」의 영향력이 의심된다.

성현이 쓴 『용재총화(慵齊叢話)』에 따르면 세조대에 ‘전경법(轉經法)’이 시행되었다고 한다. 그 내용을 보면, “세조(世祖)조에 전경법을 행하니, 이것은 고려의 옛 풍습이다. 그 법은 보동화합(寶僮華篕)을 앞세우고 누런 뚜껑이 있는 수레에다 황금으로 만든 소불상(小佛象)을 안치한다. 전후로 악인(樂人)이 주악(奏樂)하고 양종(兩宗)의 승려 수백 명이 좌우로 나뉘어 이를 따른다. 각각 향을 받들고 경을 외우며 소승은 수레에 올라 북을 쳐서 경을 외운다. 이것이 그치면 음악을 하고 음악이 그치면 경을 외우는데 부처를 받들고 궁궐에서부터 나오면 임금이 광화문까지 나와 배웅한다. 날이 맞도록 시가를 순행하여 혹은 모화관(慕華館)이나 태평관(太平館)에서 낮 공양을 베풀어 각 관청 관리들은 분주히 물건(物件)을 바치는데 오직 견책(譴責)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육법공양을 베풀었다. 피리 소리, 북소리, 염불 소리가 하늘에 진동하므로 선비의 집 부녀들이 물밀듯이 모여들어 구경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외운 경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역시 「명칭가곡」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의의

조선 태종대에 들어와 세종대 초기에 많은 논의를 일으킨 「명칭가곡」은 명나라 황제 영락제 사후 조선에서도 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국가적으로 유교를 강화하려고 노력했지만 왕실을 중심으로 불교를 숭상했던 분위기 속에서 「명칭가곡」의 위치는 자못 컸으리라 생각된다.

참고문헌

  •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국역 파한집 · 용재총화』, 동아출판사, 1964.
  • 권오성, 「세종조 불교음악 관계 문헌의 연구」, 『세종학연구』 2집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