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왕각도(滕王閣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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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강남의 3대 누각 중 하나인 등왕각을 그린 그림.

개설

등왕각(滕王閣)은 당 태종이세민의 동생 등왕(滕王)이원영(李元嬰)이 653년에 강서성 남창(南昌)에 건설한 누각이다. 등왕각은 황학루(黃鶴樓), 악양루(岳陽樓)와 함께 중국 강남 3대 누각의 하나로 일컬어지는데,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특히 당나라 시인 왕발(王勃)이 지은 시 「등왕각서(滕王閣序)」로 인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1368년 명 태조주원장(朱元璋)이 원나라 군웅 중 한 명이던 진우량(陳友諒)을 격파하고 등왕각에서 군신들에게 성대한 연회를 벌였다. 1436년 강서포정사오윤(吳潤)이 중건하여 ‘영은관(迎恩館)’이라 개칭하기도 하였다. 등왕각은 수차례 중건 과정이 있었으며, 중국 역대 문인들이 등왕각에 대한 다수의 찬문과 시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화가들이 그에 대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대표작으로 송나라 화가 곽희(郭熙), 원나라 화가 하영(夏永), 당체(唐棣)가 각각 그린 「등왕각도(滕王閣圖)」가 전해지는데, 모두 자 등을 이용해서 정밀하게 그리는 계화(界畵) 기법으로 그려진 누각도이다.

내용 및 특징

조선전기에는 성종과 중종이 등왕각도를 애호하였으며, 여러 문인들이 이에 대한 제시를 남겼다. 안평대군이용(李瑢)이 신숙주에게 자신이 소장한 서화를 보여주었는데, 그중에 원나라 때에 누각과 인물화를 잘 그렸던 이필(李弼)의 「등왕각도」·「화청궁도(華淸宮圖)」·「소상팔경(瀟湘八景)」·「현애준각도(懸崖峻閣圖)」 등이 있었다. 이색(李穡)을 비롯하여 서거정, 유호인(兪好仁), 정유길(鄭惟吉)이 각각 「등왕각도」에 대한 쓴 제시가 전한다.

조선 역대 국왕 중 특히 성종이 당나라 왕발의 「등왕각서」를 직접 어필로 써서 신하에게 하사하거나 승지들에게 「등왕각도」에 대한 제시를 지어 올리도록 하였던 사례가 있는 것을 보면, 각별히 애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477년(성종 8) 성종이 「등왕각서」를 써서 한명회(韓明澮)에게 하사했는데, 한명회가 이를 현판으로 새기니, 여러 사람들이 다투어 찍어내 병풍을 만들었다. 이를 두고 조정에서 문제가 제기되자 성종은 한명회에게 현판을 철거하고 「등왕각서」 역시 반납하라고 하였다(『성종실록』 8년 9월 28일).

또한 1478년(성종 9)에는 대내에 등왕각·황학루 두 그림의 족자(簇子)를 내어, 승정원·홍문관을 시켜 율시(律詩)를 지어서 바치게 하였다(『성종실록』 9년 12월 30일). 「등왕각도」와 「황학루도(黃鶴樓圖)」 2폭을 내어다 성종이 「황학루도」 위에 어제시를 쓰고, 주위의 승지 등에게 추첨하게 하여, 좌승지 김승경(金升卿)이 「황학루도」를 얻고, 도승지 홍귀달(洪貴達)이 「등왕각도」를 얻었다(『성종실록』 10년 1월 10일).

1536년(중종 31) 중종은 경회루에서 종2품 이하 문관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르면서 ‘등왕각’을 제목으로 칠언배율(七言排律) 20운(韻)을 짓게 하였다. 이때 으뜸을 차지한 정사룡(鄭士龍)에게 품계를 더해주었고, 차등이었던 조인규(趙仁奎)와 윤계(尹溪)에게는 망아지를 하사하였다(『중종실록』 31년 4월 22일).

참고문헌

  • 『보한재집(保閑齋集)』
  • 『사가집(四佳集)』
  • 『임당유고(林塘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