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묘(文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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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와 그 제자 및 중국과 한국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의 신위를 봉안하여 합동으로 제사하던 사우(祠宇).

개설

문묘는 중국의 공자(孔子)와 4현(賢), 10철(哲), 송조(宋朝) 6현(六賢), 공자의 제자와 중국 역대 유학자 72현, 동국(東國) 18현 등 모두 111위 유학자들의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하던 사우이다. 이들은 국립 교육기관인 성균관 즉 고려 때의 국자감과 향교에 설치되었던 대성전(大成殿)인 정전과 동·서무(東·西廡)에 봉안되었다. 문묘는 좁은 의미로는 대성전을 지칭하고 넓은 의미로는 성균관과 향교를 뜻하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흔히 공묘(孔廟)로 부르기도 한다.

내용 및 특징

문묘는 전통시대의 동아시아에서 국립 교육기관인 국자감·성균관·향교에 선현을 제사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가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을 세웠고 통일신라가 682년(신라 신문왕 2년)에 국학(國學)을 세웠으므로 이때 문묘도 함께 세웠을 가능성이 있으나, 공자와 제자들의 신위를 봉안한 기록은 717년(신라 성덕왕 16)에 처음 나타난다. 이해에 당나라에 갔던 왕자 김수충(金守忠)이 공자·10철·72제자의 화상(畵像)을 가져와 국학에 봉안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국자감에 화상이나 소상(塑像)을 봉안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위패를 봉안하였다.

조선시대 성균관의 대성전 정전에 모신 유교 성현은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인 공자와 안자·증자·자사·맹자를 일컫는 4현, 공자의 10대 제자인 10철, 송조 주돈이·장재·소옹·정호·정이·주희를 일컫는 6현, 동무(東廡)서무(西廡)에는 공자의 제자들과 중국의 저명 유학자 72명 및 동국 18현 등 모두 90위의 유학자들을 나누어 모셨다. 우리나라 유학자들인 동국 18현은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설총(薛聰), 고려의 안유(安裕)·정몽주(鄭夢周), 조선의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이이(李珥)·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박세채(朴世采)·김인후(金麟厚)·조헌(趙憲)·김집(金集) 등이다.

성균관의 문묘에는 이들 111위의 성현과 유학자들을 모두 제사하였지만, 지방의 향교에서는 그 고을의 규모에 따라 봉사하는 신위의 수가 달랐다. 그러나 공자와 4현, 동국 18현은 모두 포함되었다. 한편, 시대에 따라 제사하는 신위가 추가되기도 하고 정국의 동향에 따라 출향되기도 하여 그 수가 일정하지 않았다. 1949년 전국 유림대회의 결정으로 중국 94현의 위패는 매안(埋安)하고 동국 18현의 위패를 대성전 안에 봉안하였다.

문묘에는 정전인 대성전, 배전인 동무·서무, 강당인 명륜당(明倫堂), 헌관과 집사들의 재계소(齋戒所)인 향관청(享官廳), 제사 준비소인 전사청(典祀廳), 경비실인 수복청(守僕廳), 학생들의 숙소인 동·서재(東·西齋), 관련 도서를 보관하는 서고(書庫), 제사에 쓰는 그릇을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등의 부속 건물이 있다.

변천

서울성균관의 문묘는 1398년(태조 7)에 처음 건설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1601년(선조 34)에 중건하였다. 그 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문묘에 봉안된 우리나라의 유현(儒賢)은 고려 때인 1020년(고려 현종 11)에 배향된 최치원이 그 효시이며, 그 2년 후인 1022년에 설총이 배향되었고, 1319년(고려 충숙왕 6)에 안유가 배향되었다. 고려말의 정몽는 조선시대인 1517년(중종 12)에 성균관 학생들의 청원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인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 5현은 1610년(광해군 2)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해 문묘 배향되었다. 양현으로 불리던 이이와 성혼은 16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으나,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후에 출향(黜享)되었다가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 후에 다시 배향되면서 많은 분쟁을 야기하였다. 김장생은 1688년(숙종 14)에 배향되었고, 송시열은 1744년(영조 20)에, 송준길은 1756년(영조 32)에 배향되었다. 탕평론의 제창자였던 박세채는 1764년(영조 40)에 노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지시에 의해 배향되었고, 김인후는 1796년(정조 20)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883년(고종 20)에 조헌과 김집이 문묘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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