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도(桃源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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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경기도의 장단·연천·적성·철원 등지에 설치된 역을 관할한 역도.

개설

조선시대의 41역도(驛道) 중 하나인 도원도(桃源道)는 고려시대의 도원도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시대의 도원도는 개성에서 장단을 거쳐 철원과 회양 등지를 연결하는 역도로, 동북 지방의 중요 교통로를 관할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역도 체제를 개편하였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경기도는 도원도를 비롯해 중림도(重林道)·동화도(同化道)·평구도(平丘道)·경안도(慶安道)의 6개 역도 체제로 편성되었다. 그 뒤 성종대의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서 도원도로 확립되어, 한양과 철원을 잇는 역로 및 역을 관할하는 중심 역도가 되었다.

내용 및 특징

도원도는 조선전기 세종 연간에 역승 체제에 따라 설립되어, 도원역(桃源驛)을 비롯해 구화역(仇和驛)·백령역(白嶺驛)·옥계역(玉溪驛)·용담역(龍潭驛)·단금역(丹金驛)·상수역(相水驛) 등 7개 역을 관할하였다. 1457년(세조 3)에는 이조의 건의에 따라, 도원도의 모든 속역이 경기우도 정역찰방(程驛察訪)의 관할이 되기도 하였다. 그 뒤 성종 연간에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도원도로 개편되어, 장단의 도원역·구화역·백령역, 연천의 옥계역, 적성의 단조역(丹棗驛)·상수역(湘水驛) 등 6개 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도원도는 경기도 장단 도호부 남쪽 3리 지점에 위치한 도원역을 본역으로 하였다. 초기에는 역승이 주재하였으나, 나중에는 찰방(察訪)이 파견되어 역무를 주관하였다. 도원도의 관할 범위는 장단과 연천, 장단과 적성 및 철원을 연결하는 역로로, 한양과 동북 지방을 잇는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여진족 접대 및 6진 개척 등 외교와 국방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 도원도에 속한 역들은 모두 소로(小路)에 해당하였다. 도원도는 이후 조선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철폐되었다.

도원도 속역의 역속 및 역마 현황은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도원참의 경우 역리(驛吏) 32명, 역노(驛奴) 15명, 역비(驛婢) 6명 등이 역역(驛役)에 종사하였고, 상등마 1필, 중등마 3필, 하등마 5필 등 총 9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백령참에는 역리 16명, 역노 18명, 역비 11명과 상등마 2필, 중등마 5필, 하등마 2필 등 총 9필의 역마가 배정되어 있었다. 옥계역에는 대마 2필, 기마 2필, 복마 6필이 배치되어 있었고, 상수역에는 역리 및 역노 42명, 역비 7명과 역마 10필이 있었다. 단조역의 경우 역리 및 역노 20명, 역비 6명과 역마 5필이 배속되어 있어, 역속과 역마의 규모가 비교적 소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조선시대의 도원도는 다음 <표1>에서 보듯이 고려시대의 도원도에서 비롯되었다. 그 당시 도원도의 속역은 21개 역이었는데, 그중 조선시대의 도원도로 계승된 것은 도원역·백령역·옥계역·용담역 등 4개 역이며, 철원의 용담역은 이후 역도 개편에 따라 강원도의 은계도(銀溪道)로 이속되었다. 조선전기 세종대에는 도원도에 7개 역이 소속되어 있었으나, 성종대의 『경국대전』 체제 이후부터는 6개의 속역으로 편성되었다. 도원도는 이후 조선후기까지 6개의 속역으로 유지·존속되다가, 1896년 1월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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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해동지도(海東地圖)』
  •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 조병로, 『한국근세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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