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역(大同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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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지역의 역도(驛道) 중 하나인 대동도에 속한 역.

개설

조선시대의 대동역(大同驛)은 평양 대동문(大同門)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서경에 설치된 역이 계승, 발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서경에 설치된 역참은 절령도(岊嶺道) 소속의 회교역(迴郊驛)·생양역(生陽驛)·고원역(高原驛)·신지역(神地驛)·운봉역(雲峯驛)과 흥교도(興郊道) 소속의 안정역(安定驛)·임원역(林原驛)·현암역(玄嵒驛), 그리고 운중도(雲中道)의 속역인 장수역(長壽驛)인데, 이 가운데 어떤 역이 대동역으로 개칭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대동역이 『조선왕조실록』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409년(태종 9)에 생양관에서 대동관(大同館)까지 관승(館丞)을 1명씩 두었다는 기사를 통해서이다(『태종실록』 9년 1월 18일). 이후 성종대에 평안도 지역에 대동도(大同道)가 성립되면서, 대동역은 대동도찰방이 주재하는 중심 역이 되었다. 대동역은 평양과 의주를 연결하는 대중국 교통로이자 사행로에 위치하여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의 대동역은 대동관이라고도 했다. 1409년 1월에 생양관에서 대동관까지, 안정관에서 안흥관까지, 가평관에서 임반관까지, 양책관에서 의순관까지 각각 관승 1명씩을 파견했다는 『태종실록』의 기록에서 최초로 대동관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관(館)’은 중국 한나라의 관사(館舍) 제도에서 유래된 것으로, 사신의 숙소 기능을 한 교통 기관의 하나이다. 대동관 역시 그런 기능 때문에 역이라 하지 않고 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듯하다. 대동관은 의주의 의순관이 의순역으로 불린 것과 마찬가지로 이후 대동역으로 불렸으며, 대동참(大同站)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대동역은 조선시대 초기에는 생양관에서 대동관까지를 연결하는 역도의 속역으로 성립되었다. 1409년 관승 제도가 폐지되고 평안도의 역도가 생양도(生陽道)·안흥도(安興道)·임반도(林畔道)로 개편되면서, 대동역은 생양도의 속역이 되었다. 1429년(세종 11)에 평안도 생양관로찰방(生陽館路察訪)과 평안도 신안관로찰방(新安館路察訪)이라는 2개의 역도가 설치되면서 평안도 생양관로찰방의 소속이 되었다. 이듬해인 1430년(세종 12) 2개의 역도가 평안도 관로찰방으로 통합되어 대동역은 평안도관로찰방의 속역이 되었다. 그 뒤 성종대의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서 평안도의 역도가 다시 대동도(大同道)어천도(魚川道)로 재편되면서, 대동역은 대동도의 속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대동역은 『세종실록』「지리지」 평안도 평양부에 따르면 평양부 성 내에 있었는데,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대동문 안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평양성 안에 있는 대동문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대동역에서 역무를 담당한 역속은 1895년(고종 32)에 편찬된 『관서역지(關西驛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아전 8명, 통인 3명, 서자 6명, 마두(馬頭) 6명, 요위(驍尉) 10명, 보종(步從) 12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평안도 평양 역원 조를 살펴보면, 관군(館軍) 308명, 관노(館奴) 110명, 관비(館婢) 57명, 고공(雇工) 478명 등의 역속이 배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관서읍지(關西邑誌)』 평양지 역체(驛遞) 조에는 관군 540명과 여정 464명, 노비 25명이, 『평양속지(平壤續誌)』 역체 조에는 관군 290명과 고공 116명, 노비 274명이 배속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여지도서』평안도 평양 역원 조에 따르면, 대동역에는 상등마 4필, 중등마 32필, 하등마 8필 등 총 44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평양속지』 역체 조에는 상등마 9필, 중등마 27필, 하등마 8필로 기록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관서읍지』 평양지 역체 조에는 대동역에 상등마 10필에 마위전 9결, 중등마 20필에 마위전 9결, 하등마 90필 매 1필 마위전 3결씩 지급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한편 대동역에는 사신 접대 및 숙박 시설로 사용된 대동관이 건립되어 있었다. 『관서읍지』 평양지 공서(公署) 조에는 그 규모가 잘 나타나 있는데, 청옥(廳屋) 3칸, 전헌(前軒) 3칸, 후당(後堂) 3칸, 좌우 협문(挾門) 각 1칸, 좌우 낭방(廊房) 각 7칸, 중문(中門) 1칸, 좌우 익랑(翼廊) 각 4칸, 좌우 익랑 각문(角門) 각 1칸, 대문(大門) 3칸, 대문 4면 난간 좌우 익랑 각 4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변천

고려시대에 이미 조선시대의 평양에 해당하는 서경에 의주로 연결되는 역도가 편성되어 있었으므로, 대동역은 서경의 역로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대동관의 명칭이 최초로 나오는 것은 1409년에 서북면 관승제를 실시하여 생양관에서 대동관까지 관승을 설치한 데서 비롯되었다(『태종실록』 9년 1월 18일). 대동역은 1429년 평안도생양관로찰방의 속역으로 편성되었으며, 1430년에는 평안도관로찰방의 속역으로 재편되었다가, 성종대에 이르러 대동도와 어천도로 개편될 때 대동도 속역으로 편성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대동역은 대중국 사행로상의 교통 요충지에 위치하여 외교, 군사 및 문화 교류의 교통로 역할을 수행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 18일,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관서읍지(關西邑誌)』
  • 『관서역지부사례(關西驛誌附事例)』
  • 『대동역각양응봉응하사례(大同驛各樣應捧應下事例)』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조병로, 「조선후기의 驛誌분석(Ⅰ)-關西驛誌를 중심으로-」, 『동국사학』18,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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