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禁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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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부터 말기까지 국왕의 거처나 궁궐을 호위하던 군사의 통칭.

내용

조선전기의 금병은 정군인 갑사(甲士)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후기에는 군영군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금병은 금군(禁軍)이라고도 했으며, 내금위(內禁衛), 내시위(內侍衛), 별시위(別侍衛) 등의 병종들이 호위군의 핵심 군병이었다. 금병은 3번(番)으로 나뉘어 3교대로 근무를 하였는데, 번(番)마다 40인을 정원으로 하였다(『태종실록』 9년 6월 9일). 조선초기의 금병들은 급료 대신에 토지를 받았다. 왕실을 호위하는 병사들은 수전시위(受田侍衛) 법에 의해 수전품관(受田品官)이라고 하였다. 수전품관은 도성에만 거주하는 자들로 왕실의 호위를 전담하였다(『태종실록』 6년 5월 3일). 조선전기의 금병들은 다른 군병들과 의복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세종대까지도 시위군사(侍衛軍士)는 모두 흰옷을 입었는데, 세종대 이후부터 아청색(鴉靑色)의 속옷과 갑옷을 입고 시위하였다(『세종실록』 19년 9월 27일).

임진왜란을 계기로 금병에는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영군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궁궐의 숙위와 국왕의 행행 시 시위를 담당하여 큰 범주의 금병에 포함되었으며, 실제 국왕의 거처나 지근거리를 호위하는 것은 여전히 조선전기부터 있었던 내금위, 내시위 등이 담당하였다. 영조대까지 금병들은 궁궐의 차비문(差備門) 밖에서 사흘마다 참알(參謁)하면서 군복과 무기를 점검받았다(『영조실록』 30년 10월 2일). 특히 조선후기에는 무예청(武藝廳) 소속의 무예별감(武藝別監)들이 금병으로 새롭게 등장하였다. 이들은 국왕의 행행에서 평소 거처에 이르기까지 지근거리에서 호위에 임했다. 특히 무예별감은 훈련도감의 정예에서 선출한 병사였으므로 당대의 최정예이기도 했다. 반면에 금병들은 국왕을 지근에서 호위한다는 배경으로 인해 조선초기부터 후기까지 지방 수령도 함부로 다루지 못할 정도로 그 권세가 심했으며, 조선후기의 무예별감들은 조정의 고위직에게도 대항할 만큼 많은 폐단을 일으키기도 했다.

용례

歲壬午 拜右軍摠制 時分禁兵爲三軍 命涓爲右軍掌印摠制 甲申 陞都摠制 己丑 野人將寇朔方 以涓威惠兼全 可能制禦 出爲吉州道都按撫察理使[『세종실록』 11년(1429) 10월 11일 3번째기사]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