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청(武藝廳)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임진왜란 이후 궁궐의 국왕 거처와 국왕의 거둥 시 호위를 담당하던 무예별감의 소속 관청.

개설

무예청(武藝廳)은 임진왜란 이후 고종대까지 궁궐 내부 전각 및 각 문의 수비와 국왕의 호위(護衛)를 담당한 곳이다(『영조실록』 30년 10월 2일). 무예청은 1629년(인조 7) 훈련도감(訓鍊都監)의 출신(出身)으로 설치하였다. 무예청에서 국왕의 호위와 궁궐 수비를 담당한 사람들은 무예별감(武藝別監) 또는 무감(武監)이라고 하였다. 무예별감이란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위했던 20명의 훈련도감 무사들에게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그 노고를 치하하며 하사한 명칭이었다. 무예별감이라고 호칭한 것은 주나라의 호분위(虎賁衛)와 한나라의 우림위(羽林衛)를 모방한 것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영조는 무예청을 궁궐 내에서의 친병(親兵)이라고 하여 국왕의 직속부대 내지 경호원임을 피력하였다. 영조의 말처럼 무예청은 그 설립부터 국왕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무예청은 훈련도감 군에서 60명을 선발한 것을 시작으로 영조대에 100명으로 증원되었다. 이들은 국왕의 행행에서 근연시위(近輦侍衛)를 비롯하여 국왕의 신변을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무예청 소속 별감들은 근무 조건상 궁궐 인근에 거주하여 수시로 근무에 임하였다. 특히 국왕과 수시로 대면하는 자리에 장기간 근무해서인지, 국왕들은 이들에게 다양한 특혜를 주었다. 정조대에는 무예청을 궁저(宮底)로 들어오도록 허락하여 하나의 촌락을 이루었으며, 무예별감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훈련대장이 재목을 모아서 집을 지어 줄 정도로 특혜를 주었다(『정조실록』 6년 1월 21일).

무예청 소속은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호위하고 궁궐 내에서 근무한다는 이유로 일반 관료는 물론 당상들에게도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 그들은 궁궐의 친병(親兵)으로서 사납고 거칠다는 정평이 있었지만 국왕을 비롯한 왕실 가족을 지킨다는 명분 탓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였다(『정조실록』 5년 6월 19일). 영조대는 행행 시 무예별감이 서자지[書字的]를 구타하자 훈련대장이 별감의 처벌을 요청했다가 오히려 훈련대장이 파면되는 일까지 있었다(『영조실록』 23년 11월 9일).

조직 및 담당 직무

국왕들이 무예청의 인원을 선발하는 일은 수시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순조실록』 10년 3월 7일). 무예별감은 훈련도감의 정예병인 별기군(別技軍) 중에서 추천하여 왕의 재가를 받아 임명하였다. 이들은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총융청에 무예 교련관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무예청은 국왕의 호위가 임무였으므로, 궐내 국왕 처소의 숙위를 비롯하여 행행 시 협연군(挾輦軍)·협여군(挾輿軍)·호련대(扈輦隊)·근장군(近仗軍)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영조실록』 48년 11월 18일). 무예청의 조직은 좌번(左番)과 우번(右番)의 2개로 나뉘어 각각 1명의 통장(統長)이 지휘하였다. 1779년(정조 3) 2개의 번은 50명과 75명으로 구성되었다. 무예청의 세부조직에 관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정조대 『원행을묘의궤』에 보이는 무예청 소속 인물들을 정리하면, 정조의 주위에 작문(作門)을 이룬 통장 1인, 근장군사 2인, 협마무예청(挾馬武藝廳) 30인, 별감 6인이 시위하고 있다. 따라서 국왕의 호위에 임하는 무예청 인원은 50명 미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예청의 군사들은 무예에 뛰어난 것은 물론 병서를 간행하여 군사조련의 절차와 방법을 남기기도 했다. 정조대에 무예청의 단속(團束)과 습진(習陣)진도(陣圖)로 만든 것이 「열성항오도(列成行伍圖)」부터 「방영일면윤방도(方營一面輪放圖)」까지 14개인데, 이것들을 모아서 『이진총방(肄陣摠方)』이라고 하였다. 『이진총방』은 국왕이 참여한 가운데 거행하는 군사 훈련에 관하여 기술한 것이다. 1843년(헌종 9)에 중간하였으며 『어정이진총방(御定肄陣摠方)』이라고도 하였다.

변천

정조대 무예청은 대대적인 변화를 맞는다. 무예 출신을 장용위(壯勇衛)에 배속시키면서 장용영 설립의 기초 인원으로 활용하였다(『정조실록』 9년 7월 2일). 또한 무예청에 결원이 생기면 훈련도감에서 군병을 가려 뽑아 정하여 병조에 보고하여 낙점을 받았던 것을 장용청의 군병으로 본청(本廳)에서 가려 뽑아 곧바로 의망하도록 정식을 삼았다(『정조실록』 11년 9월 20일). 정조대의 변화는 순조 즉위 초 장용영 혁파와 동시에 환원된다.

의의

무예청은 국왕의 호위를 전담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조선시대 왕실의 경호 인력과 체제 연구에 기초가 되며, 나아가 궁궐의 숙위 체제 연구에도 필요한 부분이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홍재전서(弘齋全書)』
  • 『순재고(純齋稿)』
  • 『원행을묘의궤(園行乙卯儀軌)』
  • 『만기요람(萬機要覽)』
  • 『임하필기(林下筆記)』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