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인자(甲寅字)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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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갑인자 |
한글표제 | 갑인자 |
한자표제 | 甲寅字 |
상위어 | 금속활자(金屬活字) |
동의어 | 위부인자(衛夫人字) |
관련어 | 경진자(庚辰字), 계미자(癸未字), 계유자(癸酉字), 무신자(戊申字), 무오자(戊午字), 사주갑인자(四鑄甲寅字), 삼주갑인자(三鑄甲寅字), 오주갑인자(五鑄甲寅字), 육주갑인자(六鑄甲寅字), 임진자(壬辰字), 장영실(蔣英實), 재주갑인자(再鑄甲寅字), 정유자(丁酉字), 『주자사실(鑄字事實)』, 주자소(鑄字所),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 |
분야 | 교육·출판/출판/인쇄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종~순종 |
집필자 | 옥영정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갑인자(甲寅字)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6년 7월 2일 |
1434년(세종 16) 주자소에서 만든 금속활자.
개설
갑인자(甲寅字)는 이전에 주조한 경자자(庚子字)의 글자체가 너무 조밀하여 책을 읽기가 불편하므로 좀 더 큰 활자에 대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활자로, 주조된 글자의 수는 대자(大字)·소자(小字) 약 20여만 자였다. 활자의 자본(字本)은 경연청에 소장되었던 『효순사실』·『위선음즐』·『논어』 등의 책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부족한 글자는 진양대군(晉陽大君)의 글씨로 보충하였다.
갑인자는 1434년에 주조된 이후 1580년(선조 13) 경진년, 1618년(광해군 10) 무오년, 1668년(현종 9) 무신년, 1772년(영조 48) 임진년, 1777년(정조 1) 정유년 등 총 여섯 차례에 걸쳐 다시 주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세종 때 처음 주조되어 16세기 후반까지 쓰인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가 약 140여 년으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쓰였다. 초주갑인자의 조판은 상당한 발전을 보여 처음으로 대나무나 나무 조각으로 빈틈을 메우는 정교하고 튼튼한 조립식 인판 틀을 사용하였다. 그 결과 하루에 40여 장을 인출해 낼 수 있었다.
내용 및 특징
갑인자는 중앙 관서에서 만든 금속활자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되면서 많은 인본(印本)을 간행하였다. 또한 활자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이후 조선조 말기의 정유자(丁酉字)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섯 차례나 주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434년 7월 2일의 『조선왕조실록』 기록과 『진서산독서기을집상대학연의』·『근사록』 등의 권말에 수록된 갑인자의 주자발(鑄字跋)을 살펴보면, “선덕(宣德) 9년(1434) 7월 중추원사이천(李蕆) 등에게 앞서 만든 활자인 경자자의 자체가 가늘고 빽빽하여 열람에 어려움이 있어 다시 글자본을 써서 활자본을 만들었는데 자체가 더욱 미려하다”고 하였다.(『세종실록』 16년 7월 2일)
이때 참여한 인물로는 지중추부사이천(李蕆), 집현전 직제학김돈(金墩), 직집현전 김빈(金鑌), 호군장영실(蔣英實), 첨지사역원사이세형(李世衡), 의정부사인 정척(鄭陟), 봉상주부이순지(李純之), 훈련관 참군이의장(李義長), 보문각제학변계량(卞季良) 등이 있었다.
1434년 7월 12일부터 일을 시작하여 약 2개월 동안 20여 만 자를 주조하였고 같은 해 9월 9일부터 책을 인쇄하였는데 하루 40여 지의 인쇄가 가능하였다. 이는 이전의 경자자에 비하여 2배의 능률이 오른 것으로, 글자체가 분명하고 바르며 인쇄 기술의 개량과 발전에 아름다운 활자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세종은 책을 널리 인쇄·배포하여 많은 사람이 읽고 강독하게 하고자 하였으며 금속활자로 찍은 문장이 거듭 미려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이 나라의 만세의 이로움이 될 것이라 하였다.
갑인자 활자의 크기는 중자가 1.4×1.6㎝, 소자가 1.4×0.8㎝이다. 이는 인쇄된 책에 그 크기의 흔적이 남은 것과 활자 실물로 남아 있는 오주갑인자(五鑄甲寅字, 임진자)의 규격을 측정한 결과이다. 조판에서는 처음으로 대나무나 나무 조각으로 빈틈을 메우는 정교하고 튼튼한 조립식 인판 틀을 사용하였으며, 이는 인쇄의 능률을 높이는 기술로 발전하였다. 즉 계미자(癸未字)·경자자를 거쳐 갑인자에 이르러 조선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2배씩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갑인자의 초기 인본으로는 초주갑인자로 인쇄한 『진서산독서기을집상대학연의』와『자치통감』·『분류보주이태백시』·『근사록』 등이 현전하고 있으며, 모두 획이 바르고 부드러운 갑인자의 서체와 아름답게 인쇄된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자치통감』은 갑인자의 주조가 시작된 직후인 7월 17일에 이를 인출하기 위한 용지 300,000권을 중앙의 조지소에 50,000권, 경상도에 105,000권, 전라도에 78,000권, 충청도에 33,500권, 강원도에 33,500권씩을 배정하고 제조하게 하였는데, 그 원료인 닥나무는 국고미(國庫米)로 바꾸게 하고 그 외에 고절(蒿節, 볏짚)·죽피(竹皮)·마골(麻骨) 등을 5분의 1의 비율로써 혼합하여 쓰도록 하였다. 초주갑인자로 인쇄한 『자치통감』 현전본을 보면 다양한 유형의 종이 원료가 인출에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이 당시의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갑인자 계통의 활자에 대한 구분은 글자 모양, 판심(版心)의 어미 모양, 광곽(匡郭) 등의 차이점을 바탕으로 그 시기를 구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조선 초기에 쓰인 초주갑인자는 ‘밝을 명(明)’에 쓰인 ‘날 일(日)’이 ‘눈 목(目)’으로 쓰이고 상하하향(上下下向)의 흑어미(黑魚尾)가 판심에 쓰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사주갑인자(四鑄甲寅字)인 무신자(戊申字) 이후로는 상하내향(上下內向)의 이엽화문어미(二葉花紋魚尾)가 주로 쓰였다.
변천
갑인자는 1434년에 주조된 이후 1580년 경진년에 다시 주조하였는데, 이를 경진자(庚辰字)라 일컫는다. 갑인자의 개주(改鑄)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으나 초주(初鑄)를 포함하여 여섯 차례에 걸쳐 주조되었다는 학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경진자에 대해서도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를 근거로 1573년(선조 6) 계유년 주조설이 있었지만, 『광해군일기』와 김귀영(金貴榮)의 『동원선생집』 등의 기록에 의한 1580년 경진년 주조설이 보다 신빙성이 있다.
초주(갑인자)와 재주(경진자)를 거쳐 임진왜란 이후에도 1618년 무오년, 1668년 무신년, 1772년 임진년, 1777년 정유년에 다시 주조되었다. 개주된 갑인자 계열의 활자들은 그 순서에 따라 초주·재주(再鑄)·삼주(三鑄)·사주(四鑄)·오주(五鑄)·육주(六鑄) 등으로 구분되거나, 주조된 시기의 간지에 따라 불리기도 한다.
삼주갑인자(三鑄甲寅字)는 1618년 7월에 만들어진 금속활자로서 전쟁 전에 사용해 왔던 갑인자가 병화에 소실된 까닭으로 목각자(木刻字)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글자체가 치졸하고 이지러지기 쉬워서 종래의 주자 인쇄 제도를 복구하기 위하여 주조된 것이다. 이에 1617년(광해군 9) 주자도감을 설치하고 종래에 많이 사용하였던 갑인자를 다시 주조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인 1618년 7월에 완성하였다. 삼주갑인자는 임진왜란 후의 어려운 사정 속에서 이루어진 개주였으므로 그 규모가 비교적 작았다.
사주갑인자인 무신자는 1668년 무신년에 김좌명(金佐明)이 호조 및 병조의 물자와 인력을 이용하여 수어청에서 주성한 대자 66,100여 자와 소자 46,000여 자를 주조한 것이다. 사주갑인자는 김좌명이 서거한 지 1년 8개월 뒤인 1672년(현종 13) 10월에 교서관으로 옮겨졌으며 숙종·영조 대의 서적 간행에 많이 쓰였다.
오주갑인자인 임진자(壬辰字)는 정조가 동궁으로 있던 1772년(영조 48)에 『심경』과 『만병회춘)』을 글자본으로 주조한 150,000자의 동활자이다. 육주갑인자(六鑄甲寅字)인 정유자는 1777년 평양감사서명응(徐命膺)에게 명하여 갑인자 150,000자를 더 주조하게 하여 만든 글자이다.
임진자는 주조되어 교서관에 두었으며, 정유자는 규장각의 본원인 내각(內閣)에 따로 두고 사용하였다. 책을 찍을 때는 감독을 맡은 각신이 당시 주로 이용했던 임진자·정유자·임인자(壬寅字, 한구자) 중 어떤 활자로 찍을 것인가를 국왕에게 품의하여 사용하고 다 쓰면 본래 있던 위치로 돌려보내서 간직하게 하였다. 정유자는 1857년(철종 8)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이후에는 임진자만 사용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100,000여 자의 활자가 남아 있다.
의의
『조선왕조실록』이나 주자 발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갑인자 이전의 조선 초기 금속활자 인쇄술은 하루에 인출할 수 있는 수량이 몇 장을 넘지 못하였다. 세종 시기 끊임없는 과학 기술 개발과 서적 간행 정책에 따라 금속활자의 주조 기술·조판 기술·인쇄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하였으며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는 서적 간행의 수량과 종류가 이전 시기에 비하여 매우 풍부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활자의 주조가 조선 초기 출판 체계를 뒷받침하는 주요 요소로 자리 잡은 것임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 『한글금속활자』, 국립중앙박물관, 2006.
- 남권희, 『조선초기 금속활자 특별전 도록』, 청주고인쇄박물관, 2003.
- 윤병태, 『조선후기 활자와 책』, 범우사, 1992.
- 천혜봉, 『한국금속활자본』, 범우사, 1993.
- 『금속활자 주조 및 인쇄기술사 복원 연구 결과보고서』, 청주고인쇄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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