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자(丁酉字)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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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유자 |
한글표제 | 정유자 |
한자표제 | 丁酉字 |
상위어 | 금속 활자(金屬活字) |
동의어 | 육주갑인자(六鑄甲寅字) |
관련어 | 갑인자(甲寅字), 서명응(徐命膺), 『주자사실(鑄字事實)』 |
분야 | 교육·출판/출판/인쇄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정조~철종 |
집필자 | 옥영정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유자(丁酉字) |
1777년(정조 1) 평양감사서명응이 왕명에 따라 주조한 금속 활자.
개설
정유자(丁酉字)는 정조의 명으로 평양감사서명응(徐命膺)이 갑인자(甲寅字) 150,000자를 더 주조하여 만든 동활자로, 이를 주조한 해의 간지에 따라 정유자라 부르고, 갑인자의 주조 순서에 따라 육주갑인자(六鑄甲寅字)라 한다. 대자(大字)가 105,638자였고, 소자(小字)가 44,532자였다. 임진자(壬辰字)와 별도로 사용하기 위하여 규장각인 내각에 따로 두고 사용하였는데, 1857년(철종 8) 10월 15일 밤에 일어난 궁궐의 화재로 다른 여러 활자와 함께 정유자도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내용 및 특징
정유자 인본의 주자(鑄字) 발문에는 조선에서 국초부터 동자(銅字)를 주조하였고, 150,000자의 임진자를 주성하고 다시 갑인자를 자본(字本)으로 하여 관서(關西)에서 150,000자를 주조하여 내각에 소장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정유자로 내각과 외각 소장이 모두 300,000자라고 하였다.
정유자는 평양에서 가주(加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임진자에 보태지 않고 규장각의 본원인 내각에 따로 두고 사용하였으며, 1794년(정조 18)에 창경궁의 옛 홍문관에 설치한 주자소로 옮겨졌다. 1814년(순조 14)에 만든 『주자소응행절목』에 “위부인자(衛夫人字) 동자 105,638자, 소자 44,532자는 기영(箕營)에서 주조한 것”으로 적혀 있는 것이 바로 정유자의 이관 사실을 말해 준다.
그 인본을 살펴보면 어제(御製)·어정(御定) 등의 서책이 많으며, 주요 관부 문적들을 인출하였다. 1781년(정조 5)에 간행된『당송팔자백선』, 1799년(정조 23)에 간행된 『어정두륙천선』, 1796년(정조 20)에 간행된 『사기영선』이 대표적인 정유자 인본으로 알려져 있다.
『규장자수』는 임진자의 자보인 『신정자수』와 편집 방식, 권수의 구성이 동일하며 각 부(部)의 끝에는 부별 총자수를, 각 장(欌)의 끝에는 장별 총자수를 기록하고 권말에는 총자수를 대자·소자로 구분하였다. 권말에는 주자 업무에 종사한 감동(監董)·사관(士官)·각수(刻手)·소로장(銷罏匠) 등 17명의 명단이 있다. 주자의 감동은 사자관 이숭빈(李崇賓) 등 4명이, 사관은 이언혁(李彦赫) 등 6명이, 각수는 남태백(南泰白)·김진욱(金振郁)의 2명이, 창준(唱準)은 정치후(丁致厚)가, 주물 작업을 맡은 소로장은 김찬경(金瓚璟) 등 4명이 담당하였다. 참여한 인원 중에는 임진자를 주조할 때 참여한 사람도 있다.
『신정자수』의 권말 기록과 비교해 보면 임진자 주조 당시 인물로 정치후·남태백·김찬경 등이 동일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중에 서리(胥吏)로 참여하였던 정치후가 창준으로 직책의 변동이 있으며, 다른 사람의 소임은 동일하다. 특히 각수 남태백과 소로장 김찬경은 서울에서 동원된 인물일 것으로 여겨진다.
변천
정유자는 평양에서 가주(加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임진자에 보태지 않고 규장각의 본원인 내각에 따로 두고 사용하였으며, 1794년(정조 18)에 창경궁의 옛 홍문관에 설치한 주자소로 옮겨졌다. 1814년(순조 14)에 만든 『주자소응행절목』에 “위부인자(衛夫人字) 동자 105,638자, 소자 44,532자는 기영(箕營)에서 주조한 것”으로 적혀 있는 것이 바로 정유자의 이관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러나 정유자는 1857년 주자소에 화재가 발생하여 소장된 활자가 소실될 때 대부분 없어졌으며, 이듬해에 없어진 다른 활자들은 다시 주성되었으나 정유자만은 주조되지 않았고 임진자가 그 역할을 계속하였다. 교서관에 보관해 둔 같은 서체의 임진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의
정유자는 정조가 주조하게 한 여러 활자 중에서 즉위하여 처음으로 만든 금속 활자로, 임진자와 별도로 사용하기 위하여 내각에 따로 두고 사용하였다. 비록 사라져 버리고 없는 활자이기는 하지만 어제·어정 등의 주요 서적 인쇄에 많이 쓰였고, 활자 인쇄 문화의 꽃을 새롭게 피웠던 정조의 의지가 담긴 활자로서 그 의미가 크다.
참고문헌
- 『규장자수(奎章字藪)』
- 김두종, 『한국고인쇄기술사』, 탐구당, 1974.
- 남권희, 『조선초기 금속활자 특별전 도록』, 청주고인쇄박물관, 2003.
- 백린, 『한국도서관사연구』, 한국도서관협회, 1969.
- 윤병태, 『조선후기 활자와 책』, 범우사, 1992.
- 천혜봉, 『한국금속활자본』, 범우사, 1993.
- 『금속활자 주조 및 인쇄기술사 복원 연구 결과보고서』, 청주고인쇄박물관, 200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