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청(鄕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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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유향소의 조선후기 이름.

개설

조선전기 지방의 유향품관(留鄕品官)들의 자치 기구적 성격이 강하였던 유향소(留鄕所)가 조선후기에 수령의 보좌 기구로 변질되면서 향소(鄕所) 혹은 향청(鄕廳)이라는 용어로 많이 쓰였다. 이는 유향소의 성격과 위상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유향소의 설치 목적은 향리(鄕吏)를 규찰하고 향풍(鄕風)을 바르게 하는 등 향촌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향소가 점차 폐단이 많아지고 수령과도 충돌하는 등 문제가 되자 유향소는 여러 차례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였다. 그 뒤 사림파(士林派)의 향촌 질서 확립을 위한 대책으로써 유향소는 향사례(鄕射禮)·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실시하는 등 자치 기구로서 기능하였다.

1603년(선조 36) 경재소(京在所)의 혁파로 유향소의 우두머리인 좌수(座首)에 대한 임명권이 수령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유향소도 그 성격이 크게 달라져 수령 휘하에서 수령을 보좌하는 행정 실무의 일부를 집행하는 기구가 되었다. 효종대에는 「영장사목(營將事目)」에서 좌수를 그 지역의 군역(軍役) 징발 책임자로 규정하자 유향소는 더욱 그 지위가 격하되었다. 결국 유향소는 수령의 직무를 보조하는 일개 사역 기구로 전락하고 그에 따라 명칭도 향소 또는 향청으로 불리게 되었다.

변천

조선후기에는 향청이 하나의 향촌 기구가 되어 향교의 교임(校任)들과 다투기도 하고(『숙종실록』 13년 12월 19일) (『숙종실록』 37년 9월 24일), 향리들의 근무지인 작청(作廳)향권(鄕權)을 두고 자주 다투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김용덕, 『향청(鄕廳) 연구』, 한국연구원, 1978.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김인걸, 「조선 후기 향권의 추이와 지배층 동향: 충청도 목천현 사례」, 『한국문화』2, 1981.
  • 이태진, 「사림파의 유향소 복립 운동(上): 조선 초기 성리학 정착의 사회적 배경」, 『진단학보』34, 1972.
  • 이태진, 「사림파의 유향소 복립 운동(下): 조선 초기 성리학 정착의 사회적 배경」, 『진단학보』35, 1973.
  • 이태진, 「조선 전기의 향촌 질서: 성리학적 질서의 확립을 중심으로」, 『동아문화』13, 1976.
  • 전형택, 「17세기 담양의 향회와 향소」, 『한국사연구』64,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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