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산역(休山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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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도 지역의 역도(驛道) 중 하나인 황산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휴산역(休山驛)은 조선시대 세종 연간에 전국적으로 역로(驛路)를 정비할 때 동래신역(東萊新驛)으로 처음 설치되었다. 이후 세조대에 역제(驛制)를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휴산역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황산도(黃山道)를 구성하는 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경상도 동래군(東萊郡)에 위치하였으며,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역(驛)은 중앙 집권 체제를 유지하고, 중앙과 지방의 행정 명령 계통을 확립하기 위한 육상 교통 기관으로 설치되었다. 왕명(王命) 및 긴급한 군사 기밀의 전달, 사신의 왕래에 따른 영송지대(迎送支待) 등을 주로 담당하였으며, 그밖에 진상품 또는 공부(貢賦)의 운송 및 왕래인(往來人)의 규찰 등을 맡아보았다. 휴산역도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조선시대부터 영남 지역에 설치되었다.

조직 및 역할

역참에는 역역(驛役)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역리(驛吏)와 역노비(驛奴婢) 등을 포함한 다양한 역민(驛民)이 편성되어 있었으며, 역의 재정에 충당하기 위해 역위전(驛位田) 또는 마전(馬田)이 지급되었다.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휴산역에는 역리 166명, 역노 30명과, 중마(中馬) 2필, 복마(卜馬) 5필 등 총 7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찰방역(察訪驛)은 양산(梁山)의 황산역(黃山驛)이다.

변천

조선시대에 전국적인 역도-역로 조직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동래신역으로 설치되어 황산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동래신역은 굴화역(屈化驛)·잉보역(仍甫驛)·노곡역(奴谷驛)·구어역(仇於驛)·부평역(富平驛)·간곡역(肝谷驛)·윤산역(輪山驛)·위천역(渭川驛)·덕천역(德泉驛)·아월역(阿月驛)·성산역(省山驛)·기장신역(機張新驛)·황산역 등과 더불어 황산도에 속하였다.

세조 연간인 1460년(세조 6)에 휴산역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황산도와 성현도(省峴道)를 통합한 황산도에 소속되었다. 뒤이어 1462년(세조 8)에 각 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해 찰방(察訪)역승(驛丞)을 둘 때, 황산역·윤산역·위천역·소산역·신명역(新明驛)·아월역·간곡역·굴화역·부평역·덕천역 등 10개 역과 함께 황산도역승의 관할이 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전기의 역참 제도가 완비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서도 휴산역은 여전히 황산도에 속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따르면, 휴산역은 동래군 관아 남쪽 1리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낙민동 일대에 해당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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