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역(神林驛)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10일 (일) 01:52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강원도의 도로망인 보안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강원도 원주시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신림역(神林驛)은 고려 성종에서 문종 연간에 역로(驛路)를 22역도(驛道)-525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할 때 평구도(平丘道) 원주(原州)에 위치했던 역이다. 조선시대에는 세조 때 전국의 역로를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보안도(保安道)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가 되었고, 이후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신림역은 고려시대부터 강원도 원주 지역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평구도에 속한 30개소의 역 가운데 하나였다. 정확한 설치 시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고려의 역제(驛制)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995년(고려 성종 14)에서 1067년(고려 문종 21) 사이에 평구도에 소속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연간에 전국적인 역도-역로 조직을 갖추는 과정에서 보안역(保安驛)·인람역(仁嵐驛)·부창역(富昌驛) 등과 함께 보안도에 속하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원주 편에 따르면, 신림역에는 복마(卜馬) 3필과 역노(驛奴) 15명, 역비(驛婢) 16명이 배속되어 있었고, 역리(驛吏)는 없었다.

변천

조선시대의 역제는 세조 연간에만 해도 세 차례나 개편되었다. 그 중 첫 번째 개편이 단행된 1457년(세조 3)에는 역을 관장하던 역승(驛丞)을 없애고 찰방(察訪)이 여러 역도를 아울러 관리하게 하였다. 그런데 찰방이 관할하는 역이 많고 길이 멀리 떨어져 있는 까닭에 두루 살피기가 어려워지자, 역로가 피폐해지는 등의 각종 폐단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1462년(세조 8)에 병조의 건의에 따라 세 번째 개편을 단행해, 각 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하여 찰방과 역승을 두게 하였다. 신림역은 그 과정에서 보안역·인람역·부창역 등과 함께 보안도찰방이 관할하는 역의 하나가 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이후 조선후기까지 보안도에 속한 역으로 존속하였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신림역의 위치는 『여지도서』에는 원주목 관아 동남쪽 45리,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원주목 동쪽 40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원주목 동쪽 45리 지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원주에는 신림역 외에도 단구역(丹丘驛)·안창역(安昌驛)·유원역(由原驛)·신흥역(神興驛) 등이 있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