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역(輸城驛)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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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수성역 |
한글표제 | 수성역 |
한자표제 | 輸城驛 |
상위어 | 수성도(輸城道) |
동의어 | 무롱이참(無籠耳站), 용성참(龍城站), 수성참(輸城站), 수성역(輸誠驛) |
관련어 | 속역(屬驛), 명원도(明原道), 역리(驛吏), 역노(驛奴), 역비(驛婢), 역승(驛丞), 찰방(察訪) |
분야 | 경제/교통/육운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朝鮮) |
집필자 | 조병로 |
폐지 시기 | 1896년(건양 1) 1월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수성역(輸城驛)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7년 3월 26일, 『숙종실록』 3년 8월 23일, 『성종실록』 17년 1월 27일, 『중종실록』 32년 4월 23일, 『숙종실록』 6년 10월 16일, 『고종실록』 7년 7월 27일 |
조선시대 함경도의 역도(驛道) 중 하나인 수성도에 속한 역.
개설
함경도의 역은 고려시대에 개성의 산예역(狻猊驛)에서 함흥의 선덕역(宣德驛)까지만 역로가 개설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연간에 고려의 지방 행정 구역인 오도 양계(五道兩界)를 개편하면서 동북면 지방에 역참을 신설하였는데, 그에 따라 홍원에서 경원까지 역로가 확대되었다. 그 뒤 1440년(세종 22)에 경성의 주촌참(朱村站)·오촌참(吾村站)·용성참(龍城站)·부가참(富家站)과 경원의 시원참(時原站)·옹구참(翁口站)·강양참(江陽站)을 수성도(輸城道)의 속역으로 편성했는데, 이 수성도의 본역이 바로 수성역(輸城驛)이다. 수성역은 한양과 6진을 잇는 북로(北路)의 요해처에 설치된 역으로, 여진족의 왕래에 따른 영송(迎送)과 접대뿐 아니라 6진을 방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 경성군 조에 따르면, 수성역은 고려시대에는 무롱이참(無籠耳站)으로 불렸는데, 조선초기인 1398년(태조 7)에 용성참(龍城站)으로 개칭되었다가 1417년(태종 17)에 다시 수성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런데 『고려사(高麗史)』 참역(站驛) 조에는 무롱이참을 추정할 만한 역명이 보이지 않고, 용성참도 이전의 재성참(在城站)을 개칭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무롱이참 또는 재성참이 용성참을 거쳐 수성참으로 개칭된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수성참이라는 명칭은 1445년(세종 27) 3월에 함길도의 참로찰방(站路察訪)을 폐지하고, 길주(吉州)에서 수성참까지를 명원도(明原道)로 재편할 때 처음으로 등장한다(『세종실록』 27년 3월 26일). 그런데 이듬해에는 수성역(輸誠驛)으로 기록되어 있고, 선조 이후에는 수성역(輸城驛)으로 표기되어 있어, 또다시 명칭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다른 13개 역과 더불어 시리도(施利道)의 속역으로 편성되었으며, 이후 『경국대전』 체제에서는 수성도의 속역으로 이속되었다.
조직 및 역할
수성역은 일반적인 다른 역들과 마찬가지로 왕명과 공문서의 전달, 진상품 등 공공 물자의 운송, 사신의 영송 및 접대, 왕래인의 규찰과 역마의 입대(立待) 등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1677년(숙종 3)에는 특별히 수성역의 군사 1,300명과 북병영 군사 1,600명을 하나의 영(營)으로 합치고, 수성도 찰방(察訪)이 천총(千總)을 겸직하여 이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게 하였다(『숙종실록』 3년 8월 23일). 여진족 등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수성역의 역속들이 군사적인 역할까지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수성역의 역속과 역마 배치 현황은 『여지도서(輿地圖書)』와 『북관읍지(北關邑誌)』 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 함경도 종성 역원 조에 따르면, 수성역에는 역리(驛吏) 289명, 역노(驛奴) 61명, 역비(驛婢) 35명과, 상등마 2필, 중등마 4필, 하등마 14필 등 총 20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고종 연간에 편찬된 『북관읍지』에는 역리 281명, 역노 62명, 역비 34명과 역마 20필이 배정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수성도의 속역을 관할하게 하기 위해 본역인 수성역에 역승(驛丞)을 두었다가 찰방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이들 찰방이 폐단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486년(성종 17)에는 수성도찰방이었던 김수천(金守仟)이 둔전에서 수확한 콩 4석으로 사사로이 말을 기르고, 해채(海菜)를 쌀과 바꾸어 기생 홍화(紅花)와 종에게 준 일 등이 발각되어 벌을 받았다(『성종실록』 17년 1월 27일). 또 1537년(중종 32)에는 사간원에서, 수성도찰방 정기(鄭沂)가 방탕하고 사특하여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 하여 체직할 것을 간하였다(『중종실록』 32년 4월 23일).
변천
수성역은 교통 기관으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외적을 방어하는 요충지로서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1677년에는 수성역의 군사와 북병영의 군사를 하나의 군영에 소속시켜 수성도찰방이 교련을 관장하게 하였다. 1680년(숙종 6)에는 역졸들을 군대에 편성하였다(『숙종실록』 6년 10월 16일). 또 1870년(고종 7)에는 수성역에 성첩을 신축하기도 하였다(『고종실록』 7년 7월 27일). 이처럼 수성역은 다른 역과 달리 여진족을 비롯한 외적으로부터 6진을 방어하는 등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수성역은 조선후기까지 존속하였는데, 『여지도서』와 『대동지지(大東地志)』, 『북관읍지』 등의 기록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 뒤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북관읍지(北關邑誌)』
- 『관북역사례(關北驛事例)』
- 조병로, 『한국근세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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