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영(暗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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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영에서 야간 동안 일체의 흔적을 없애서 진영을 은폐·엄폐하는 군사 행동.

개설

조선시대까지 소개되었던 병서와 병법 등에는 군영을 설치한 뒤 주간과 야간 동안 시행해야 할 행동지침 등이 나와 있지만 아군의 진영을 야간에 은폐·엄폐하기 위한 방법이나 규정 등은 따로 설명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는 직접 군사훈련을 지휘하면서 장용영(壯勇營)훈련도감(訓鍊都監)에 명하여 아군 진영을 야간 동안 은폐·엄폐하는 훈련을 시행하도록 했고 아울러 구체적 시행 방안에 대한 장수들의 의견을 청취해 훈련법을 결정했다.

내용

1790년(정조 14) 정조는 용산(龍山)의 별영(別營)에 행차해서 서도와 북도의 별부료무사(別付料武士)들을 불러 모아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객관인 모화관(慕華館)에서 활쏘기 시험을 보도록 명령했다. 이후 정조는 융복(戎服) 차림으로 가교(駕轎)를 타고 선화문(宣化門)으로 나가서 군사훈련을 주도하고 교외의 처소에 머물고자 했다. 여러 대신들이 정조의 건강 문제로 갑작스러운 교외 행차 등을 반대했다. 하지만 정조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교외에 나아가 장용영과 훈련도감의 군사를 불러 모아 직접 군사훈련을 진행했다(『정조실록』 14년 11월 18일).

당시 정조는 특별히 장용영과 훈련도감의 군사들을 인솔하고 야간 군사 훈련을 진행하고자 했다. 따라서 밤 11시~새벽 1시 사이에 해당하는 3경에 선전관(宣傳官)과 장용영 및 훈련도감의 지구관(知彀官)들을 은밀히 불러 야간 동안 아군 진영의 흔적을 일체 없애서 군영을 은폐·엄폐하는 군사 행동을 훈련하고자 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를 통해 정조는 조선만의 암영 제도[暗營之制]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정조는 병서에 비록 군영의 주간 행동과 야간 행동 때의 행동지침 등이 있지만 주둔한 군영에서 등불과 횃불을 없애 아군을 은폐·엄폐하는 행동의 지침 등은 정확히 설명할 만한 규정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군대의 움직임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을 수 없고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하고 변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긴 영전(令箭) 2대를 쏘아 보내고 또 검은 고초쌍등(高招雙燈)을 깃대에 달아 각 군영에 신호하면, 각 군영은 등불이 다 켜진 뒤에 곧 등불을 가져다가 원래의 장소에 간직하고 횃불은 신호를 보는 즉시 없애버리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군영 간의 암호는 기존과 마찬가지지만 이동할 때와 주둔할 때는 변화를 주도록 하고 서로 신호를 보낼 때 작고 짧은 화살을 쓰지 말도록 지시했다.

이후 정조가 군교들에게 아군의 군영을 암영으로 만들기 위한 의견을 구하자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다. 이 중 장용영 군교지득귀(池得龜)가 ‘암영’이란 말이 이미 장막 밖으로 새어나와 장수와 군사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어 군중이 자못 소란해지고 있으니, 명령 내리는 것을 지체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암영은 은밀히 행군하거나 긴급하게 비밀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므로 중앙 병영에서 작고 짧은 화살로 명령을 전달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1명만 등불을 지키고 나머지는 모두 초병으로 나열해 서서 이동하지 말고, 검은 신전(信箭)과 검은 방기(方旗)도 쓰지 말고 병서에서 참고가 될 만한 것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중군(中軍)이 먼저 영전 2대를 가지고 군영 장수에게 전달하면 군영 장수가 각 대장(隊長)에게 알려 한 차례 돌려 전달한 후 앞 초소 제1대장에게 넘기면 대장이 1대를 뽑아내 1사(司)에 교부하여 파총(把摠)이 가져다 조사해보고, 1대는 그대로 전하여 군영에 도로 내려준다면 명령이 은밀히 전달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장용영의 긴 영전 6대를 가져다가 2대는 가운데 군영에 전달한 뒤 관하 사(司)·초(哨)·기(旗)·대(隊)에 차례로 전달하게 하고, 2대는 선전관에게 전하여 무예청의 호위하는 장수와 군사들에게 돌려 전달하게 하고, 2대는 바깥 호위를 수행한 군영 장수에게 전하여 그가 거느린 군사들에게 돌려 전달하게 하자고 주장했다. 아울러 먼저 2대를 전한 다음에 1대를 전하여 명령을 확인했다는 점을 두루 알게 하고 언어와 호령을 쓰지 않아야 함을 강조했다. 다음에 장막 앞에 있는 검은 고초기(高招旗)에 두 개의 등을 달아 높이 신호를 보내고 즉시 등불을 제거하면 각 군영은 일체 상응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만약 떠들면서 정숙하지 않거나 호령이 분명하지 못한 부대가 있다면 군중의 규율에 따라 처벌하면 된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설명한 절차를 야간 동안 군영을 은폐·엄폐하는 방법으로 활용해달라고 요청했다.

정조는 지득귀의 의견을 매우 가상히 여겨 그의 방법대로 훈련을 진행시켰다. 이에 따라 선전관이 긴 영전을 전하여 쌍등(雙燈)으로 점멸 신호를 하여 명령이 끝나자 장막 안팎의 모든 등불과 횃불이 일제히 없어졌으며, 강변의 마을 집까지 한 점의 불빛도 없게 되었다. 훈련 결과를 목격한 정조는 크게 기뻐하며 조선의 군대도 뛰어난 규율을 갖추고 있다고 할 만하다고 말했다(『정조실록』 14년 11월 18일).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