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실청(産室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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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나 왕세자빈의 출산과 관련된 일을 담당한 임시 관서.

개설

왕실에서는 의관의 진찰을 통해 왕비나 왕세자빈의 임신이 확인되면, 출산 예정일 3개월 전에 산실청을 조직하였다가 출산 후 7일째에 권초제(捲草祭)를 행한 뒤 해체하였다. 산실청에 소속된 3명의 제조와 의관, 의녀들은 수시로 문안하여 산모의 건강 상태를 파악하고, 필요한 약물을 결정하고, 혹시나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대처했다. 또 각 기관에서 출산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는 것을 감독하기도 하였다. 출산 후에는 태를 씻는 세태(洗胎) 의식이나 권초제 같은 다양한 의례들을 담당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왕조실록』에서 산실청에 대한 논의는 1603년(선조 36)에 처음 등장한다.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의 출산을 앞두고, 왕비의 산실에 관한 규정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선조는 특별히 사관을 평안도 영변(寧邊)으로 보내 묘향산 사고에 보관해 둔 『조선왕조실록』에서 왕비의 산실과 담당 관원의 포상에 관한 옛 법규를 살피고 오라고 명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선조실록』 36년 3월 21일). 당시에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그동안의 기록들이 거의 유실되어 현실적으로 참고할 만한 등록(謄錄)이 없었다. 따라서 왕비의 출산과 관련하여 새로이 규정을 만들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때 내의원에서 ‘중전산실청’이라는 명칭을 제안하였고, 산실청과 관련된 규정들을 세부적으로 정비하였다.

조직 및 역할

『육전조례』 「예전」 내의원 산실청 조와 일제 강점기에 작성된 『대군공주어탄생의 제』에 정리된 산실청의 직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내의원 도제조 1명, 내의원 제조 1명, 내의원 부제조 1명, 권초관 1명, 별입직어의 5명, 침의 1명, 의약동참 2명, 의녀 2명, 별장무관 1명, 대령서원 4명, 전향주시관 1명, 범철관 1명, 택일관 1명이다.

산실청에는 대개 내의원 도제조 이하 총 22명이 소속되었는데, 경우에 따라 의관이나 서원 등이 추가되기도 하였다. 또 출산 후 배출된 태를 길일을 택해 태봉에 묻는 장태 의례를 주관하는 안태사나 배태관을 산실청에 소속시키기도 하였다. 권초관은 특별히 다복하고 아들을 많이 둔 대신 가운데서 선정했는데, 출산 후 7일째에 행하는 권초제를 주관하였다. 산실청은 규정상 출산 예정일 3개월 전에 설치되고, 출산 후 7일째에 해체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문안이나 숙직 등의 번거로움으로 인해 산모에게 특별한 건강상의 문제가 없으면 1개월 전에 설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해체되는 시기 또한 경우에 따라 출산 후 7일이 지난 이후가 되기도 하였다.

산실청의 주요 업무는 산모의 건강 상태를 파악하고, 출산 장소인 산실을 배설하며, 필요시 산모와 신생아에게 제공할 약물들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역할들은 내의원의 세 명의 제조와 의관, 의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변천

산실청이 공식적으로 설치된 시기는 17세기 이후이다. 그 이전에도 왕비와 왕세자빈의 출산 장소인 산실을 배설하고, 내의원의 의료진이 출산을 도왔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1551년(명종 6)에 중궁 산실의 의원들을 한 자급씩 올려 주고 의녀들에게도 물품을 하사하라고 하였고(『명종실록』 6년 6월 4일), 1596년(선조 29)에는 세자빈의 산실을 배설했다는 기록이 보인다(『선조실록』 29년 5월 22일). 하지만 제도적인 차원에서 내의원에 소속된 임시 관서로서 산실청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17세기에 들어와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의 출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산실청에 대한 논의가 처음으로 대두되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산실청’이라는 구체적인 명칭이 등장하는 것은 1603년(선조 36)이다. 그 당시에는 왕비의 출산을 담당하는 관서의 명칭을 ‘중전산실청’으로 정하였다(『선조실록』 36년 3월 22일).

한편 선조대 이전까지 궁궐에서 출산이 허용된 여성은 왕비, 왕세자빈 등과 같이 왕위 계승자를 낳을 자격이 있는 여성으로 한정되었다. 후궁의 경우 궁궐 밖 사가에서 출산하였으므로 특별한 관서를 설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조 때 후궁이 궁궐 내에서 출산하는 것을 허용하였고, 그에 따라 후궁의 출산을 돕기 위해 호산청(護産廳)이라는 관서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다만, 왕비와 후궁의 신분적 차이를 두기 위해 관서의 명칭, 소속 관원들의 지위에는 차등을 두었다.

산실청이 조직되면, 산실청에서 이루어진 제반 사항들을 일일이 기록으로 남긴다. 하지만 왕비의 출산에 관한 기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에 비해 후궁의 출산에 관한 기록인 『호산청일기』는 2건이 남아 있다.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와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출산 기록이다.

참고문헌

  • 『육전조례(六典條例)』「예전(禮典)」
  • 『산실청총규(産室廳總規)』
  • 『호산청일기(護産廳日記)』
  • 『호산청소일기(護産廳小日記)』
  • 김지영, 「조선 왕실의 출산문화 연구: 역사인류학적 접근」,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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