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향관(陪享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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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의례 중 길례(吉禮)흉례(凶禮)의 의식에서 일을 맡은 제향관(諸享官) 외에 참여하는 일반 제관(祭官).

개설

조선시대에 거행한 국가 의례 중 길례(吉禮)흉례(凶禮)의 의식에서 제사일을 맡은 일반 제관을 말한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배향관을 둔 경위나 목적에 대해 문헌에 뚜렷하게 명기하고 있지 않다. 다만, ‘배향관’이라는 명칭을 통해 제향을 지낼 때 향관을 돕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사시급속절향문소전의(四時及俗節享文昭殿儀), 향문선왕시학의(享文宣王視學儀) 등에서 배향관의 자리는 외정(外庭)에 설치하였다. 문관 1품 이하는 묘정(廟庭) 동쪽에, 종친과 무관 1품 이하는 묘정 서쪽에 설치하되, 품등마다 자리를 달리하여 겹줄로 북향하게 하고 마주한 곳을 상위(上位)로 하였다. 농사를 짓는 방법을 처음으로 가르쳤다는 신농씨에게 풍년을 기원하며 제향하는 의식인 향선농의(享先農儀)의 경우는 문·무관과 종친 모두 북쪽을 상위로 하고 동서로 마주보게 하였다. 향선농의에서 제향관이 임시로 머물 막차(幕次)는 제방(齋坊) 안에 설치한 제향관의 자리와 막차 앞 지세(地勢)의 편의에 따라 설치하였다. 사시와 납일에 종묘(宗廟)와 문소전에 제사를 드리는 사시급랍향종묘의(四時及臘享宗廟儀)와 사시급속절향문소전의, 그리고 신주(神主)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의(祔廟儀) 등에서는 제사지내는 날 세 번 향을 피어올리고 신령의 강림을 바라며, 울창주(鬱鬯酒)를 땅에 뿌리고 폐백을 올리는 의식인 신관례(晨祼禮)를 행할 때와 향선농의와 향문선왕시학의에서 신에게 예물을 올리는 전폐례(奠幣禮)를 행할 때에 배향관은 당일 축시(丑時) 3각(刻) 전에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고 문외위(門外位)에 나아갔다. 1각은 약 15분이다. 선왕의 능을 참배하는 배릉의(拜陵儀)에서는 의식 시작 3각 전 모두 상복인 담복(禫服)을 입고 능실(陵室) 남쪽으로 나아가 대기하였다가 의례가 시작되면 향관을 도와 제향 의례를 수행하였다.

변천

『조선왕조실록』에는 1475년(성종 6)에 배향관이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그때는 조복(朝服)을 입었다(『성종실록』 6년 1월 25일)(『성종실록』 6년 2월 12일).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배향관을 품계에 따라 좀 더 세분화시켰다. 배향관의 4품 이상은 조복 차림을 하고, 5품 이하는 평소 집무를 수행할 때의 복장인 상복(常服) 차림을 하도록 하였다. 이후 대한제국 시기인 1898년(광무 2) 말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하는 『대한예전(大韓禮典)』에도 배향관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국가 제사 중 특히 종묘 제사를 지낼 경우 폐지되지 않고 계속 있었던 제관이라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대한예전(大韓禮典)』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