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상(內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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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각도 절제사의 군영.

개설

원래 내상은 고려시대 궁중에서 숙직하던 군졸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고려후기에 들어서면서 5군(軍) 또는 3군으로 편성되는 출정군에서 총사령관인 중군병마원수(中軍兵馬元帥)나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 아래 참여하는 막료(幕僚)로서 의미를 가졌다. 이후 군사행정을 전담하는 수령관이나 진무소 조직으로 조직이 분화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중앙의 내상직은 내금위(內禁衛)로 변경되면서 이후 내상은 각도 절제사(節制使)가 주둔하는 군영(軍營)의 다른 명칭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원래 내상은 고려시대에는 궁중에서 숙직하면서 경비를 담당하던 군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고려후기에 들어서면서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중앙에서 3군이나 5군으로 편성하여 출동하는 출정군의 최고 사령관인 중군병마원수나 중군병마사 휘하에 있던 여러 명의 막료들, 예를 들어 병마판관(兵馬判官)과 병마녹사(兵馬綠事)를 지칭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주로 군기(軍機)의 유지와 군령 전달 및 여러 군사 관련 행정을 맡고 있었다.

한편 1280년(고려 충렬왕 6) 2차 일본 원정을 전후하여 원나라의 군사제도에서 영향을 받아 만호(萬戶) 제도가 고려에 도입되면서 기존 방호사(防護使) 등이 방호소(防護所)를 중심으로 지방의 군사를 지휘 관리하고 전쟁 등의 상황이 있을 경우 임시로 지휘사(指揮使)를 파견하여 도 단위의 방어를 담당하게 하던 국방체제에 변화가 나타났다. 즉 만호부(萬戶府)가 설치되고 만호부에서 방호소를 통제하는 체제가 만들어졌다. 만호제의 등장으로 중앙의 출정군과 지방군의 사령부에 군령 기구와 군사 행정 실무기구가 분화되면서 수령관(首領官)진무소(鎭撫所), 또는 녹사가 설치되어 기존 내상은 분화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권력을 잡은 재추(宰樞)급 인사가 평상시에도 원수 또는 만호로서 장기간 군사권을 장악하고 그 휘하 장교와 사적인 영속관계를 유지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에 전시(戰時)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휘하의 군사를 내상이라고 칭하면서 자의적으로 통솔하게 되면서 여러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고려말 군대가 본래의 기능에서 벗어나 권세가들과 사적인 관계를 맺고 이들의 개인적인 이익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함에 따라 이를 정비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고려말 지방 군사력을 정비하기 위해 도원수 이상의 고위 장수들이 특정한 도(道)의 방어를 전적으로 담당하도록 도원수가 도순문사(都巡問使)를 겸하도록 하였다. 도순문사영(都巡問使營)에 성곽을 축조하여 휘하 군사를 증강하고, 계수관으로 임명되는 수령으로서 겸하는 원수 또는 병마사를 지휘하도록 하는 도 중심의 군사제도가 정비되었다. 도순문사영에는 군사와 함께 여러 막료 조직이 갖추어지게 된다. 이는 조선시대 각도의 병마절제사 체제의 원형을 이루게 된다. 내상이 이후 병마절제사영을 의미하는 이칭으로 사용된 것은 이러한 사정의 반영이었다.

한편 조선 건국 초기 잡다한 특수 병종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중에서 왕권 강화 및 궁중의 호위를 담당하던 근시병(近侍兵)의 직임을 단일화하여 체계를 정비하기 위해 궁중에 무질서하게 입직 숙위하던 군사를 하나로 묶어 하나의 전담 부대를 만들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1407년(태종 7) 10월 내상직(內上直)을 고쳐 내금위를 편성하게 된다(『태종실록』 7년 10월 21일). 이 내상직은 내상직(內廂直)과 동일한 것이었다(『세종실록』 30년 9월 22일).

내상직이 내금위로 정리되면서 내상이라는 명칭은 이제 각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본영의 이칭으로만 사용되었으며 아울러 계수관의 중요지로서 의미를 가졌다. 내상에는 영진군과 함께 휘하의 참모들이 상주하면서 방어에 임하도록 하였다.

조직 및 역할

고려후기 중군병마원수나 중군병마사 아래의 막료로 구성된 내상에는 여러 명의 병마판관과 병마녹사가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군기 유지나 군령 및 군정(軍政) 관련 업무를 맡았으나 그 기구가 기능에 따라 뚜렷하게 분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상은 이후 고려말 원간섭기를 거치면서 구성원이 군사행정을 담당하는 수령관(首領官)과 군령 전달을 책임지는 진무소(鎭撫所)로 나뉘어 소속되면서 그 직임이 분명해졌다. 고려말에는 각도의 방어를 책임진 도순문사가 임명되고 이들의 주둔지로서 도순문사영이 주요 요충지에 건설되고 아울러 성곽 등 방어시설과 휘하 군사 및 각종 참모조직 등을 갖추게 된다.

각도별로 방어를 책임진 도순문사영은 조선시대 들어서면서 도절제사영으로 명칭이 변하게 된다. 도절제사영은 내상으로 이칭되었는데 이곳에는 자체적인 참모 조직과 함께 상주 병력이 주둔하였고, 이들은 주로 영진군(營鎭軍) 등으로 구성되었다.

변천

고려시대 군기 유지와 군령 및 군정 업무를 보좌하기 위해 두었던 여러 명의 병마판관과 병마녹사 등의 막료로 조직되었던 내상은 원간섭기 군령기구와 군정기구가 분화되면서 구성원이 수령관(首領官)진무소(鎭撫所)로 나뉘어 소속되면서 그 직임은 분명하게 된다. 고려말 각도의 방어를 책임진 도순문사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도순문사영은 성곽 등 군사시설과 막료조직, 그리고 휘하 군사력을 가지게 된다. 이 도순문사영은 조선초기에는 병마절제사영으로 변경되고 이를 내상으로 칭하게 되었다. 내상은 각도 군사력의 중심지였으므로 이곳에는 군기 및 식량 창고 등이 갖추어졌고 군기 등을 만드는 공장도 갖추게 된다. 조선초기 군기를 제조하던 도회소(都會所)를 여기에 두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단종실록』 1년 6월 9일). 내상에는 대체로 수백 명의 각도 진군(鎭軍)이 배치되었는데, 1462년(세조 8)의 경우 충청도 및 전라도 내상에는 정군 500명, 경상우도 및 경상좌도에는 600명, 황해도 300명, 강원도 200명 등이 있었다(『세조실록』 8년 6월 28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고려사(高麗史)』
  • 『고대일록(孤臺日錄)』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오종록, 「고려후기의 군사 지휘체계」, 『국사관논총』24 , 국사편찬위원회,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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