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생보(樂生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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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 아악 담당 악인(樂人)인 악생의 보인(保人).

개설

악생보(樂生保)는 조선시대에 각종 제례에서 아악을 담당한 악생의 보인이다. 보인이란 역(役)을 지지 않는 대신, 역을 지는 사람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사람을 말한다. 악생의 직무는 평민들이 부담하는 국역(國役)의 일종으로 파악되어 전국적으로 악생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관원과 달리 녹봉을 받는 것이 아니고 봉족, 즉 공역(公役)에 복무하는 자를 돕기 위하여 금품 또는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을 배당 받았다. 악생보는 출사하지 않은 장정으로, 출사한 악생의 비용을 베나 쌀로 조달한 사람을 말한다.

담당 직무

악생은 사직(社稷)·각 산천(山川)·석전(釋奠) 등의 제향에서 아악기 연주와 일무(佾舞)를 담당했다. 유교 사상에 기초를 둔 조선시대에 조상을 받드는 일은 나라의 근본과 관련된 것이었다. 따라서 주로 제례에 사용하던 아악을 담당한 악생의 직무는 중요하게 여겨졌다. 악생보는 이들을 위해서 각각 베 2필씩을 바쳤다.

변천

악생보는 1704년(숙종 30) 균역(均役) 절목(節目)에 베 2필씩을 바치도록 되어있었다. 1798년(정조 22) 군역 총수의 기록에 의하면 악생보는 서울 인근 경기 지역에 있었는데, 용인에서 12명, 안산에서 3명, 시흥에서 4명이었고 돈으로 환산하면 1명당 2냥씩이었다.

1629년(인조 7)에 장악원이 아뢴 내용에 따르면, 당시에는 출사하고 있는 악생의 수가 50명도 채 되지 않는 실정이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악생을 서울 사람으로 뽑아서 쓰고 제향이 없을 때는 자기 집에 물러가 있게 했는데 임진왜란 후에도 흩어진 악생들이 모이지 않았다. 빠진 악생을 채우기 위하여 각 지방에 악생 수를 나누어 배정했으나 군(郡)이나 현(縣)에서는 배정된 수를 채우기 어려웠고 이 때문에 악생의 수는 턱없이 모자랐다. 따라서 지방 악생 가운데 출사하지 않은 자는 서울의 보병(步兵)인 출사한 자를 보조하는 자로 바꾸어 정하면서 악생이 악생보가 되기도 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국립국악원 편, 『역대 국립음악기관 연구: 신라 음성서에서 국립국악원 개원까지』, 국립국악원,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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