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군(鎭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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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거진(巨鎭) 이하의 진과 임진왜란 이후 진영(鎭營)에 소속되어 국방과 치안 유지 등을 담당했던 군인.

개설

조선시대의 진군은 1397년(태조 6) 각 도의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혁파하고 첨절제사(僉節制使)를 ‘경상도 4곳, 전라도 4곳, 충청도 3곳, 풍해도 2곳, 강원도 2곳’의 진에 설치하면서 성립되었다. 15개의 진이 대부분 연안(沿岸)에 설치된 것을 통해, 왜구를 격퇴하는 등 바다를 방어하는 것이 진군의 핵심 기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1398년 도절제사가 복원되어 도절제사의 영(營)에 군병이 설치되었음에도 진은 계속 유지되어 영진군(營鎭軍)이 지방 육군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1455년(세조 1) 평안도·함길도의 군익도체제(軍翼道體制)가 전국으로 확대되고 내륙에도 거진이 설치되어 진군은 내륙 방어도 담당하게 되었고, 1457년 중첩된 ‘익’으로 인하여 기동성이 제약받는 문제점 등을 개선하기 위해 군익도체제가 진관체제(鎭管體制)로 바뀌자 진군은 거진을 중심으로 훈련과 방어를 담당하였다.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지 못하였고 결국 도성과 평양성 등이 함락되었다. 그러다가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에 효용성이 입증된 명(明)나라의 『기효신서(紀效新書)』 병법을 도입하여, 1593년 중앙의 훈련도감은 물론이고 1594년 지방에 속오군을 창설하여 육군을 개편하였다. 그리하여 진관체제의 거진과 제진(諸鎭)의 군병을 진영(鎭營)에 소속시키고, 진영의 영장(營將)이 거진의 병마첨절제사를 대신하여 훈련과 점열을 주관하는 진영제도가 시행되게 되었다. 여기에서 영장을 진영장으로 부르고, 청주진영과 청주진을 함께 사용한다는 점에서 진영군을 진군으로 볼 수 있다.

조선후기 진군은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국방의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일본의 침략에 대비한 조령·죽령의 방어와 왕의 피난처로 활용되는 남한산성과 강화도의 방어 등도 담당하였다. 아울러 현종대부터 청나라와의 전쟁 위험이 감소한 상황에서 도적의 출현이 심해지자 진군은 치안 유지의 임무도 수행하였고, 수재(水災)가 심한 경우 대민 지원에도 참여하였다.

한편 진군은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지방군이 혁파되면서 함께 폐지되었다.

담당 직무

진군은 조선시대 지방의 거진 이하의 진을 비롯하여 조선후기 육군의 진영에 설치된 군병을 말한다. 조선초기 영진군은 1398년 도절제사가 파견된 영과 1397년 첨절제사가 파견된 진을 합친 명칭이므로 병영·수영·감영은 주진(主鎭)이지만 소속 군병을 영군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조선후기 진영은 조선전기 육군의 거진·제진에 소속되는 군대로 편성하였고 최고 지휘관인 영장을 진영장이라고 불렀으며 진영과 진이라는 용어를 함께 사용했다는 점에서 진영군을 진군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본다.

우선 조선시대 진군의 종류와 수에 대해 충청도의 경우를, 『세종실록지리지』와 『여지도서』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의 <표 1>, <표 2>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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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은 『세종실록지리지』의 조선전기 충청도 순성진·남포진 군병의 종류와 수를 기재한 것이다. 순성진과 남포진은 각각 서산과 보령의 해안가에 위치하였고, 병마첨절제사가 최고 지휘관으로서 방어의 책임을 담당하였다. 두 진의 군병은 유방군·패속군·신백정·수성군·진속군 등으로 구성되었고, 순성진은 469명 그리고 남포진은 453명이었다.

이에 비해 <표 2>는 영조대 편찬된 『여지도서』의 조선후기 충청도 5진영 군병의 종류와 수를 기록한 것이다. 조선시대 전기 진군에 비해 후기 진군은 종류도 다양하고 5개 중 4개의 진이 4천 명을 넘을 정도로 수도 많다. 아울러 천총·파총·초관·기고관·기패관 등은 임진왜란 중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명의 『기효신서』 병법을 도입하여 훈련도감과 속오군을 창설하면서 새로 설치된 병종이다.

다음으로 진군은 ‘국방, 치안 유지, 대민 지원’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국방과 관련하여 진군의 바다 방어 기능은, 1397년(태조 6) 설치된 15개의 진과 『세종실록지리지』의 17개 진이 육군의 진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연해 지역에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은 충청도 수영은 물론이고 육군 병영도 서해안 해미(海美)에 설치된 것이나, 세종대 전체 군액 약 11만 명 중에서 수군이 단일 병종으로 가장 많은 50,402명을 차지한 것 등에서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에는 유사시 왕의 피난처인 강화도의 방어는 물론이고, 중국 해적이나 청나라·프랑스·미국·일본 등의 침략과 관련하여 수군 진군의 바다 방어가 강조되었다. 물론 조운선이 침몰하지 않고 목표 지점까지 안전하게 도착하도록 호송하는 것도 수군 진군의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진군의 내륙 방어 기능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에서 수군과 달리 육군이 일본군의 북진을 막지 못해 왕이 의주까지 도망을 가게 됨으로써,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그리하여 청주진에게 추풍령의 방어를, 그리고 충주진에게 조령 방어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유사시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일본군이나 반란군이 진격하는 것을 저지하려 하였다.

아울러 청나라의 침공 때 왕의 대피처로 활용되던 남한산성의 방어군에 경기도의 진군은 물론이고 강원도 원주진·회양진과 충청도 청주진·충주진의 군병을 편성시켰다(『효종실록』 2년 6월 3일).

진군의 변경 방어 기능은 평안도와 함경도의 진군에서 두드러진다. 진군은 조선전기 서울에서 파견되는 조방장(助防將)과 함께 여진족의 침입을 막았고, 조선후기에는 국경을 함부로 넘은 죄인을 체포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한편 진군은 현종대에 청나라와의 전쟁 위험이 감소한 상황에서 도적의 출현이 심해지자 도둑, 사사로이 동전을 만들어 유통시키는 자[私鑄錢者], 천주교도, 민란 주모자와 적극 가담자를 체포하거나 호랑이를 포획하는 등 치안 유지를 담당하였다. 수재가 심각했던 1810~1859년에 충청도의 진군은 조련 대신 제언(堤堰)을 수축하는 대민 지원도 하였다.

변천

조선시대 진군은 1397년(태조 6) 각 도에 파견하였던 병마도절제사를 혁파한 다음, ‘경상도 합포·강주·영해·동래, 전라도 목포·조양·옥구·흥덕, 충청도 순성·남포·이산, 풍해도 풍주·옹진, 강원도 삼척·간성’에 진을 설치하고 첨절제사를 파견하면서 성립되었다(『태조실록』 6년 5월 21일). 아울러 1398년 도절제사가 다시 설치되었지만 진군은 계속 유지되면서 17개의 진을 『세종실록지리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고, 도절제사가 파견되는 영과 첨절제사가 파견되는 진이 합쳐진 영진군이 지방 육군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어 1455년(세조 1) 평안도·함길도의 군익도체제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내지에도 거진을 설치하여 방어하도록 하였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군익도란 각 도를 몇 개의 군익도로 나누고, 각 군익도는 다시 중·좌·우의 3익으로 편성하여 인근의 여러 고을을 여기에 소속시켜 하나의 군사 단위를 이루도록 한 것을 말한다. 1457년에는 ‘도’라는 지역적 성격보다 ‘진’이 갖는 요새지·군사 기지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중첩된 ‘익’으로 인하여 기동성이 제약받는 문제점 등을 개선하기 위해 군익도체제를 진관체제로 바꾸었다.

진관체제는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가 최고 지휘관인 주진, 병마절제사와 병마첨절제사·수군첨절제사가 최고 지휘관인 거진, 병마동첨절제사·병마절제도위와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최고 지휘관인 제진(諸鎭)으로 구성되었다. 진관체제에서 진군(鎭軍)은 거진·제진의 군병을 의미하며, 진군은 평시에는 거진 즉 진관의 최고 지휘관인 첨절제사로부터 훈련과 병기의 점검 등을 받고 유사시에는 진관에 집결하여 주장의 명령에 따라 방어를 담당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에서 육군은 일본군의 북진을 막지 못해 도성과 평양성 등이 함락되고 왕은 의주까지 도망을 갔다. 그러다가 1593년 1월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후, 정부는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에 효용성이 입증된 명나라의 『기효신서』 병법을 도입하여 훈련도감과 속오군을 창설함으로써 임진왜란에서 드러난 군사의 문제점을 시정하려 하였다. 아울러 ‘영(營)-사(司)-초(哨)-기(旗)-대(隊)’로 군대의 편제를 바꾸면서 조선전기 거진과 제진에 속했던 군병은 새로 설치된 진영에 소속되었고, 영장이 조선전기 거진의 병마첨절제사를 대신하여 훈련과 점열 등을 주관하였다.

한편 현종대에는 청나라와의 전쟁 위험이 감소한 상황에서 도적의 출현이 심해지자 1665년(현종 6)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영장이 토포사를 겸임하는 것을 계기로 진군은 도적의 체포 등 치안 유지에도 관여하였다.

진군은 1895년 을미개혁 때 지방군이 혁파되면서 함께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 『기효신서(紀效新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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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