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제학(直提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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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관(弘文館) 소속의 정3품 당하관 관원, 도승지(都承旨)가 겸임한 예문관(藝文館) 정3품 관원.

개설

직제학(直提學)은 1401년(태종 1)에 예문관을 개편하면서 2명을 두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집현전이 설치되면서 직제학은 종3품 녹관(祿官)이 되었다. 이후 예문관 직제학은 도승지가 겸임하면서 왕의 명령이나 글을 대신 짓는 일을 주관했고, 집현전의 뒤를 이어 설치된 홍문관 직제학은 경연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후기 정조 때에는 규장각에 직제학을 두어 각신(閣臣)의 중심 역할을 하게 했다.

담당 직무

홍문관 직제학은 문한(文翰)을 담당하며, 왕의 질문에 대비하는 직무를 띤다. 직제학은 집현전과 홍문관의 대표적인 학자 관료로, 관료 사회에서 문풍(文風)의 방향을 좌우했다. 이들에게는 왕의 명령이나 글을 대신 짓는 역할과 더불어 고문(顧問)에 대비하는 경연관의 역할이 필수적이었다.

직제학의 역할은 자문, 교육, 문한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직제학의 직무는 경연관이었다. 직제학은 부제학, 승지 6명과 함께 경연 참찬관(參贊官)을 맡아 지사(知事)동지사(同知事)를 보좌하는 직무를 맡았다.

한편 홍문관이 국가의 모든 편찬 사업을 주관하였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직제학도 성종대의 『동국통감』과 『동국여지승람』 등의 편찬에 참여했고, 이런 역할은 조선후기까지도 그대로 이어졌다.

『경국대전』에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부터 부수찬(副修撰)에 이르는 관원에게 지제교를 겸임하게 했으므로, 직제학도 지제교의 직무를 띠었다. 직제학은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서 편찬에서도 중요한 관직이었다. 직제학은 다른 홍문관 관원과 함께 춘추관 편수관을 겸직하면서 직접 기록을 작성하는 사관(史官)의 직무를 수행했다. 실록청(實錄廳)이 설치되어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게 되면 실록청 편찬관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직제학은 예문관 응교(應敎)를 겸직하게 했다. 즉, 직제학은 왕의 명령이나 글을 대신 짓는 대제학과 제학의 직무를 보좌하는 기능을 띠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예문관 직제학은 도승지가 겸임하도록 했는데, 이 역시 대제학과 제학이 왕의 글을 대신 짓는 일을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보좌하려는 조치로 보인다.

변천

직제학이란 관직은 고려시대에 보이지 않는 조선의 고유한 관직이다. 1401년에 예문관 직제학으로 생겼다가, 다시 집현전 종3품 관직으로 바뀌었다. 직제학은 세종대 문화 발전에 기여하다가 세조에 의해 집현전이 폐지되면서 직제학도 없어졌다.

1470년(성종 1) 예문관을 녹관화하면서 다시 직제학을 두어 집현전 직제학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게 했다. 이후 1478년(성종 9)에 홍문관이 집현전의 후신으로 설치되면서 직제학도 집현전 때와 같은 역할을 회복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강독(講讀)과 고명(誥命)을 맡는 경연청(經筵廳)을 두었는데, 직제학은 이때 시강(侍講)으로 바뀐 듯하다. 1907년(융희 1) 홍문관이 폐지되면서 직제학도 함께 없어졌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귀천 원유한 교수 정년 기념 논총 간행위원회 편, 『귀천 원유한 교수 정년 기념 논총』 상·하, 혜안, 2000.
  • 박천규, 「문형고」, 『사학지』 6, 1972.
  • 오항녕, 「조선초기 문한관서의 정비와 사관제도」, 『한국사학보』 7, 1999.
  • 유영옥, 「집현전의 운영과 사상적 경향: 성리학 이해를 중심으로」, 『부대사학』 18, 1994.
  • 정두희, 「집현전 학사 연구」, 『전북사학』 4, 1980.
  • 최승희, 「조선초기 언관에 관한 연구: 집현전의 언관화」, 『한국사론』 1, 1973.
  • 최인기, 「조선초기 문원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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