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鳳扇)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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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봉선 |
한글표제 | 봉선 |
한자표제 | 鳳扇 |
상위어 | 의물(儀物) |
관련어 | 당악정재(唐樂呈才), 봉황(鳳凰), 작선(雀扇), 정재(呈才) |
분야 | 문화/예술/정재 |
유형 | 물품·도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 조선 |
왕대 | 고려, 조선 |
집필자 | 조경아 |
용도 | 의물, 의장 |
재질 | 대나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봉선(鳳扇)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0년 5월 26일, 『세종실록』 6년 6월 14일 |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당악정재(唐樂呈才)를 상연할 때 사용한 봉황이 그려진 부채 모양의 의물(儀物).
개설
고려시대부터 당악정재를 공연할 때 사용한 부채 모양의 의물로, 홍색 비단으로 된 부채 좌우에 금색의 봉황이 한 마리씩 그려져 있다. 당악정재를 상연할 때는, 무대 좌우에 각각 2명씩 차례대로 인인장(引人杖)·정절(旌節)·용선(龍扇)·정절·봉선·정절·작선(雀扇)·정절·미선(尾扇) 등을 들고 서서 춤을 추었다. 이때 봉선을 든 2명은 좌우로 나뉘어, 용선 뒤의 정절과 작선 앞의 정절 사이에 위치하였다(『세종실록』 10년 5월 26일).
연원 및 변천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따르면, 봉선은 고려시대의 당악정재인 헌선도(獻仙桃)·오양선(五羊仙)·포구락(抛毬樂) 정재 등에 사용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전기에는 금척(金尺)·수보록(受寶籙)·근천정(覲天庭)·수명명(受明命)·하황은(荷皇恩)·하성명(賀聖明)·성택(聖澤)·육화대(六花隊)·곡파(曲破) 등의 당악정재에 의물로 쓰였고, 이례적으로 향악정재(鄕樂呈才)인 봉래의(鳳來儀)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1901년(고종 38)의 『(신축)진연의궤』를 살펴보면, 1897년(고종 34)에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에는 봉선을 홍색 비단이 아니라 황제의 색인 황색의 비단으로 만들고 ‘황봉선’이라고 불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형태
봉선은 정재의장(呈才儀仗)뿐 아니라 일반적인 의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그 모양은 서로 달랐다(『세종실록』 6년 6월 14일). 정재의장으로 쓰인 봉선의 형태는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봉선의 자루는 대나무로 만들었다. 부채의 테두리는 쇠로 둘렀으며, 부채의 양면은 홍색 비단을 씌워 초록 실로 꿰매고 금색으로 채색한 봉황을 그려 넣었다. 채색이 아니라 수를 놓는 방식으로 봉황을 넣는 경우도 있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예부터 봉황이 나타나면 성군의 덕치가 펼쳐져 천하가 평안해진다고 여겼다. 그래서 궁궐에 봉황을 장식하여 봉궐(鳳闕)이라 하고, 왕이 타고 다니는 가마를 봉여(鳳輿)라 하여 현 왕조가 태평성대임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봉황은 군왕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나, 중국에서는 황후나 태자비의 상징으로 쓰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악학궤범(樂學軌範)』
- 『순조기축진찬의궤(純祖己丑進饌儀軌)』
- 『고종신축진연의궤(高宗辛丑進宴儀軌)』
- 국립국악원, 『신역 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 국립국악원, 『국악기의 문양과 장식』, 국립국악원, 2006.
- 한국문화상징사전편찬위원회, 『한국문화상징사전』, 동아출판사, 199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