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절(旌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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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당악정재(唐樂呈才)를 공연할 때 사용한 일곱 층의 휘장이 달린 의물(儀物).

개설

정절(旌節)은 고려시대부터 당악정재에 쓰인 7층 휘장 모양의 의물을 말한다. 당악정재를 공연할 때, 무대 좌우에 각각 2명씩 차례대로 인인장(引人杖)·정절·용선(龍扇)·정절·봉선(鳳扇)·정절·작선(雀扇)·정절·미선(尾扇) 등을 들고 서서 춤을 추었다. 이때 정절은 든 기녀 8명은 좌우로 나뉘어 2명씩, 인인장과 용선 사이, 용선과 봉선 사이, 봉선과 작선 사이, 작선과 미선 사이에 위치하였다

연원 및 변천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따르면, 정절은 고려시대의 당악정재인 헌선도(獻仙桃)·오양선(五羊仙)·포구락(抛毬樂) 정재 등에서 의물로 사용되었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따르면, 조선시대 전기에는 새롭게 창작된 금척(金尺)·수보록(受寶籙)·근천정(覲天庭)·수명명(受明命)·하황은(荷皇恩)·하성명(賀聖明)·성택(聖澤)·육화대(六花隊)·곡파(曲破) 등의 당악정재에 의물로 쓰였으며, 이례적으로 향악정재인 봉래의(鳳來儀)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 세종대의 성택 정재에서는 정절을 드는 기녀의 수가 일시적으로 6명으로 변경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0년 5월 26일). 이후 정절은 조선시대 후기까지 정재의 의물로 사용되었는데, 1901년(광무 5)에 편찬된 『고종신축진연의궤(高宗辛丑進宴儀軌)』 「악기풍물(樂器風物)」을 살펴보면, 1897년(광무 1)에 대한제국을 선포함에 따라 황제국의 격에 맞게 정절이 황정절(黃旌節)로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정절은 가례와 흉례 때도 의장으로 쓰였고, 세자와 세손의 의장에 포함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26년 12월 14일).

형태

정절은 정재의장(呈才儀仗)뿐 아니라 일반적인 의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그 형태에는 차이가 있었다. 정재의장으로 쓰인 정절의 형태는 『악학궤범』에 자세히 전한다. 먼저 대나무 자루의 꼭대기[頂子]는 나무로 만들어 주홍칠을 하고, 채색한 그림이 그려진 나무 덮개를 꿴다. 그 아래 홍색·녹색·흑색 비단으로 휘장을 세 개 만드는데, 개(蓋)와 모양은 같지만 크기가 조금 작다. 정절의 휘장은 모두 7층이며, 각 층 안에는 구리 방울[銅鈴]을 하나씩 달고, 밖에는 기(旗)에 다는 솔인 유소(流蘇)를 삼색 비단으로 드리우는데, 삼색 비단에는 모두 금색의 꽃무늬[金花紋]를 박는다. 대나무 자루 전체의 길이는 3자 3치이고, 나무 덮개의 지름은 6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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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민속 관련 사항

1829년(순조 29)의 『순조기축진찬의궤(純祖己丑進饌儀軌)』에 따르면, 정절 8자루를 만드는 비용은 246냥 8전 8푼이었다. 화원(畵員) 2명, 마조장(磨造匠) 2명, 궁인(弓人) 5명은 4일간 일했고, 칠장(漆匠) 5명, 부금장(付金匠) 2명, 두석장(豆錫匠) 2명은 5일간 일했으며, 침선비(針線婢) 6명은 6일간 일하였다. 이들은 정절을 만드는 동안 매일 쌀 3되와 무명 1자 1치 6푼을 받았는데, 침선비는 그보다 적은 1전을 매일 식대로 받았다. 그에 비해 1901년의 『고종신축진연의궤(高宗辛丑進宴儀軌)』에 따르면, 황정절 8자루를 만드는 데는 990냥 5전의 비용이 들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악학궤범(樂學軌範)』
  • 『순조기축진찬의궤(純祖己丑進饌儀軌)』
  • 『고종신축진연의궤(高宗辛丑進宴儀軌)』
  • 국립국악원, 『신역 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 송방송·조경아 외, 『국역 순조기축진찬의궤: 권3·부편』, 민속원, 2007.
  • 성현 저, 렴정권 역, 『악학궤범』, 평앙국립출판사, 1956.
  • 한국예술학과 음악사료강독회 역주, 『고종신축진연의궤: 권3』,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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