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산(墳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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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묘를 조성한 산.

개설

분산(墳山)은 분묘(墳墓)를 근거로 수호 권리가 미치는 범위를 의미한다. 분묘 수호자는 분묘를 중심으로 일정 범위를 배타적으로 점유(占有)할 수 있는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았다. 여기에는 분산 안에 다른 사람이 침범하여 분묘를 조성하거나 경작, 방목(放牧), 나무 작벌 등 일체의 행위를 금지할 수 있는 권한이 포함되었다. 고려는 문무 양반의 분산 범위를 제도화하였고, 조선은 고려의 제도를 재정비하여 종친 및 사대부 계층의 분산 수호를 법적으로 보장하였다. 16세기 이후 종법(宗法) 질서와 유교적 상장례(喪葬禮)가 본격화되면서 분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확대됨에 따라 분산의 규모는 점차 확대되고 이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도 본격화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전근대 사회에서 공동 묘역을 벗어나 독립적인 분산을 수호하는 계층은 제한적이었다. 타인의 침범을 막을 수 있는 법적 근거와 현실적 세력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에 문무 양반의 분산 규모를 제도적으로 규정하였다. 976년(고려 경종 1) 2월에 1품은 방(方) 90보, 2품 이하는 10보씩 체감하고 6품 이하는 30보를 설정하였다. 조선은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분산 규모를 재정비하였다(『태종실록』 4년 3월 29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종친 1품이 사면(四面) 각 100보, 2품 이하는 10보씩 체감하여 6품은 사면 각 50보를 보장하였다. 문무 관료는 1품이 사면 각 90보, 2품 이하는 10보씩 체감하여 6품이 40보이고, 7품 이하는 6품에 준하여 40보를 허용하였다. 생원·진사 및 유음자제(有蔭子弟) 등 일반 사대부들에게도 6품에 준하여 분산 수호를 법적으로 보장하였다. 이는 관품에 따라 분산의 규모를 다르게 설정한 차등보수(差等步數)의 성격을 띠며, 하층민들의 분산에 대해서는 법적인 보호 장치를 설정하지 못한 한계성을 보인다.

내용

조선 사회는 16세기 이후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종족 의식이 강화되고 가문과 선조를 위한 사업인 위선사업(爲先事業)이 활성화되면서 사대부 계층의 분산에 대한 관심과 욕구가 증대하였다. 부계 중심의 분묘들이 한 곳에 집중되면서 종산(宗山), 즉 선산이 형성되고, 조상의 안거(安居)를 위한 자손의 도리를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풍수설과 결합하여 명당자리를 찾기 위한 열풍이 불었다. 분산의 규모도 점차 확대되면서 『경국대전』의 규정을 넘어서는 좌청룡 우백호의 산줄기를 수호 영역으로 관철시켜 갔다. 그 결과 1676년(숙종 2)에 이르면 사대부의 묘산 안에 청룡·백호의 안쪽으로 산을 가꾸는 곳은 다른 사람이 분묘를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또 그 외의 청룡·백호 밖은 양산이라 하여도 임의로 광점(廣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숙종실록』 2년 3월 4일) 수교가 내려져 국가적 차원에서 공인되었으며, 이후 『속대전(續大典)』에 정식 법 조항으로 수록하였다.

조선후기 성리학적 상장례가 일반화되면서 하층민들도 공동 묘역인 북망산에서 벗어나 독립 분산을 확보하기 위한 욕구가 높아져 갔다. 1718년(숙종 44)에 이르면 상한(常漢)이 부모를 계장(繼葬)한 곳을 같은 산줄기 안의 양반이 점탈할 경우에는 주인 있는 분산 안에 도장(盜葬)한 율에 따라 장 80을 치고 기한을 독촉해 파내 옮기도록 하여 하층민의 분산에 대해서도 법적인 보호 장치를 마련하였다.

변천

17~18세기를 거치며 국가에서는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여 용호(龍虎) 수호를 공인함으로써 사대부 계층의 분산 확대 현상을 법적으로 수용하고, 하층민의 분산에 대한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등 제도적 정비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제도 정비에도 불구하고 분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분산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불러왔다. 특히 『속대전』의 용호 규정은 『경국대전』의 차등보수(差等步數)와 충돌하면서 산송(山訟)을 촉발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명당자리에 대한 욕구로 다른 사람의 분산을 침해하는 투장(偸葬)의 폐단도 성행하였다. 하층민의 분산은 법적인 보호 장치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세력의 한계로 사족 층의 침해를 당하여 독립 분산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와 동시에 하층민들도 분산 욕구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사대부 층의 분산을 침해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조선후기 산림 생산물의 활용성이 높아짐에 따라 분산 내의 나무에 대한 경제적 관심도 증가하였다. 특히 건축, 선박, 자염(煮鹽) 등의 생산을 위한 목재와 온돌의 보급에 따른 땔나무 수요가 급증하였다. 분산 수호자들은 금양(禁養)하는 나무를 불법적으로 베어가는 투작(偸斫)으로 분산 수호자들은 위기에 직면하고 전국의 산들은 황폐화되어 갔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 김경숙, 『조선의 묘지소송』, 문학동네, 2012.
  • 김경숙, 「조선후기 山訟과 사회갈등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 김선경, 「조선후기 산송과 산림소유권의 실태」, 『동방학지』77·78·79, 1993.
  • 전경목, 「조선후기 산송연구」,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 한상권, 「조선후기 산송의 실태와 성격 : 정조대 上言·擊錚의 분석을 중심으로」, 『성곡논총』27,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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