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작(偸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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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주인의 허락 없이 나무를 불법적으로 베어내는 일.

개설

투작(偸斫)은 조선후기 산림 생산물의 경제적 효용성이 높아지고 산림 이용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대하면서 사회 문제화하였다. 투작의 폐단은 국가의 금산(禁山)이나 개인의 분산(墳山), 향촌 공동체의 공용산(共用山) 등을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발생하며 조선후기 산림 황폐화의 주범이 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에는 산림천택(山林川澤)은 여민공지(與民共之) 즉 산림과 천택은 백성이 함께 공유한다는 이념에 근거하여 온 백성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산림의 사점(私占)과 분할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양반층은 분산 수호를 통해 배타적인 점유권을 확보하고, 영역 안의 나무를 금양(禁養)하고 산림 생산물을 독점 활용할 수 있는 산림 이용의 권한을 누렸다. 국가에서도 국용 목재 수요를 확보하기 위하여 금산을 지정하여 일반 백성들의 접근을 금지하고, 투작에 대하여 엄격하게 처벌하였다. 금산의 소나무를 베거나 가지를 치는 사람은 나무와 농작물을 훼손한 죄에 준하여 절도죄를 적용하였다. 연목(椽木) 이상으로 온 그루[全株]를 투작한 경우에는 가장(家長)에게도 책임을 물어 형률을 적용하였다(『세종실록』 4년 윤12월 22일).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동을 바탕으로 산림의 경제적 효용성이 높아지면서 송추(松楸) 및 목재 등 산림 생산물의 수요가 높아져갔다. 관청·서원·사우의 중건, 선박의 제조, 관곽(棺槨)의 제작 등은 목재 수요 확대가 주요 요인이었다. 한편 땔나무의 수요도 급증하였는데, 조선후기 온돌의 전국적인 보급에 따른 난방용 땔나무와 자염(煮鹽)·광산·숯 등 경제적 생산 활동을 위한 땔나무 수요가 중심을 이루었다. 이러한 산림 생산물의 수요 급증으로 각 계층마다 산림 이용권 확보를 위한 노력들이 시도되었다. 그 과정에서 국가의 금산이나 타인의 분산을 불법적으로 침해하는 사회 문제를 초래하는데, 이는 대체로 목재나 땔나무를 투작하는 형태로 표출되었다.

내용

조선후기 투작은 국가의 능원(陵園)이나 금산, 개인의 분산, 향촌 공동체의 공용산 등 대상을 가리지 않고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성행하였다. 국가의 금산에서는 산림을 지키고 투작을 막아야 할 감독관이나 수호 군인들이 스스로 투작의 폐단을 일으키는 상황이었다(『영조실록』 50년 6월 3일). 정조대 암행어사권준은 투작한 널판지를 운반하는 길목에 배치한 금판장교(禁板將校)에게 불법으로 반출된널빤지에 대한 책임을 전담시키면서 오히려 금판장교가 투작하는 상황을 야기하는 폐단을 보고하였다(『정조실록』 24년 4월 16일). 또한 투작을 범한 감독관이나 수호 군인들에게는 속죄금을 징수하였는데 이 또한 오히려 투작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투작을 범한 감독관이나 수호 군인에 대한 처벌은 형장을 때리고 귀양을 보내는 방식으로 변경하고 속죄금 징수를 금지하였다(『고종실록』 11년 11월 6일).

개인의 분산도 투작의 주요 피해 대상이었다. 분산 수호자에게 구역 내의 나무를 잘 기르고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을 수 있는 양산금양권(養山禁養權)이 주어졌다. 이들이 개인 분산에서 기른 아름드리 큰 소나무들과 땔감들은 조선후기 산림 생산물의 경제적 효용성이 높아지면서 투작의 대상이 되었다. 투작은 송추(松楸) 투작과 땔나무 채취가 중심을 이루었다. 송추 투작은 건축물, 선박, 관곽 제작 등에 필요한 목재를 팔아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저질러졌다. 호강한 양반들은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세력이 약한 양반이나 힘없는 백성들의 분산을 침범하여 대규모로 투작을 자행하였다. 향리층도 관용(官用)을 빙자하여 개인 분산의 송추를 작벌하면서 정해진 숫자보다 더 많이 투작하는 폐단을 일으켰다. 목상(木商)들의 모리(牟利) 행위 또한 대규모 투작의 원인이었다.

땔나무, 즉 시초(柴草) 투작은 촌민이나 초군(樵軍)들을 중심으로 주로 생계유지의 차원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온돌의 보급으로 땔나무가 집집마다 일상적인 필수품이 되었기 때문에 분산을 확보하지 못한 하층민들은 투작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광범위한 땔나무 수요 증대는 투작으로 이어졌고 조선후기 산림 황폐화의 주범이 되었다. 특히 초군들은 땔나무를 판매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산림이 주된 활동 공간이자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에 양반층의 양산금양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주로 집단을 이루어 공동 작업을 하였는데 100여 명이 넘는 조직들까지 등장하였다. 금작자(禁斫者)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대규모의 세력을 형성하여 투작 활동을 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수백명에서 수천명이 무리를 지어 인가를 불태우는 등의 소란을 일으키는 민란의 단계로 진입하기도 하였다(『철종실록』 13년 5월 20일).

변천

조선후기 송추 및 땔나무 투작이 성행하면서 전국의 산들은 벌거숭이가 되어갔다. 도로에서 송추를 싣고 가는 우마(牛馬)를 만나기 어렵지 않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투작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국가에서는 산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금송(禁松) 정책을 강화하고 수차례에 걸쳐 금송 절목을 정비하였다. 투작이 발생하면 투작자 뿐만 아니라 투작 사실을 점검하지 못한 감독관까지 투작자와 동일한 형벌로 처벌하면서 엄격하게 규제하였다. 향촌 공동체에서는 촌락민들을 중심으로 공용산의 산림 보호와 공용목(共用木) 확보를 위한 금송계(禁松契) 결성이 활성하게 이루어졌다. 개인 분산에서도 송추를 보호하기 위하여 관에 입지(立旨) 요청하여 소유권을 공증받아 확고히 하는 경향이 증가하였다. 또한 산지기를 두어 분묘 수호와 함께 송추 관리를 강화시키고, 족계 및 금송계와 같은 공동체 원리를 도입하는 등 다양한 방법들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각종 규제와 대응책에도 불구하고 투작은 갈수록 성행하고 확대되어 조선후기 산림 황폐화의 주범이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김경숙, 『조선의 묘지소송』, 문학동네, 2012.
  • 김경숙, 「조선후기 山訟과 사회갈등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 김선경, 「조선후기 산송과 산림소유권의 실태」, 『동방학지』77·78·79, 1993.
  • 전경목, 「조선후기 산송연구」,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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