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군(樵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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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생계유지를 위해 나무를 베어다 팔던 하층민, 또는 마을 단위로 조직되었던 나무꾼 조직.

개설

초군(樵軍)은 나무꾼, 또는 마을 단위 나무꾼 조직을 지칭한다. 초군은 마을 단위의 최하층민으로 구성된 조직이었으므로 조선후기 민란이나 농민 항쟁기에 주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원래 초군은 생계유지를 위해 나무를 베어다 땔감으로 팔아서 살아가는 나무꾼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땔감의 마련을 위하여 임시로 조직되어 활동했던 나무꾼 조직을 초군이라고 불렀다. 동절기에 필요한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풀이나 나무를 미리 장만해 두어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가까운 산은 양반가나 지주들의 사유지로 조상들의 분묘(墳墓)를 보호하기 위해 송계(松契)를 조직하는 등 산림 보호 조치가 강하여 벌목이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이에 따라 땔감 판매로 생계를 유지하는 초군이나 일반 농민은 땔감 마련을 위하여 먼 곳으로 나무를 하러 가야 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농한기나 동절기에 만들어진 임시적인 나무꾼 조직이 바로 초군이었다. 땔나무를 하는 아이들은 초패, 혹은 초군패라고도 불렀다.

변천

초군은 마을 단위의 최하층민으로 구성된 조직이어서 조선후기 민란이나 농민 항쟁기에 주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1862년(철종 13) 공주와 연산, 회덕 등 충청도의 민란에서 각 면의 초군이 도당을 이루어 부잣집에 불을 지르는 등 항의와 시위를 벌였다(『철종실록』 13년 5월 16일) (『철종실록』 13년 5월 20일) (『철종실록』 13년 5월 22일). 임술민란에서도 농민과 함께 초군이 중심이 되었는데, 진주에서는 농민군이 스스로를 초군이라 불렀다고 한다.

20세기 초 경상북도 순흥 지역에서는 초군청(樵軍廳)이라는 조직이 있었다. 이는 땔나무 채취권을 확보하기 위한 나무꾼 조직이자, 호미씻이[草宴]와 같은 농부들 중심의 축제를 위한 조직이었고, 또한 지역 단위 성황제를 수행하기 위한 제의(祭儀) 조직이었다.

참고문헌

  • 주강현, 「두레 공동노동의 사적 검토와 생산문화」, 『노동과 굿: 일하는 사람들의 삶과 세계관』, 학민사, 1989.
  • 배영동, 「근대시기 ‘순흥초군청(順興樵軍廳)’ 결성의 배경과 의의」, 『실천민속학연구』22, 2013.
  • 이해준, 「조선 후기 향촌 사회 질서의 변화와 기층민 문제: 연구 시각과 방향을 중심으로」, 『대구사학』37, 1989.
  • 이해준, 「조선시대 향도와 촌계류 촌락 조직」, 『역사민속학』1, 1991.
  • 정승모,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변동과 농민 조직」, 『역사민속학』1,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