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궁(大嬪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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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생모인 희빈장씨의 제향을 위해 건립한 제사궁(祭祀宮).

개설

대빈궁은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사궁이다. 희빈장씨는 숙종 연간에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정쟁으로 폐위되자, 중궁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5년 만에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어 사약을 받았다. 그러나 1722년(경종 2) 경종에 의해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되고(『경종실록』 2년 10월 10일), 향교동에 대빈궁을 마련하여 신위를 모셨다. 희빈장씨의 위패는 현재 종로구 궁정동의 칠궁(七宮)에 있다.

위치 및 용도

희빈장씨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담당하는 궁으로 건설되었다. 중부(中部)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에 건립되었으나, 1908년(융희 2) 통감부(統監府)에서 황실 재산 정리의 명목으로 제사궁들을 정리할 때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겨 들어가면서 사우(祠宇)는 훼철되고 땅은 국유지가 되었다(『순종실록』 1년 7월 23일).

변천 및 현황

희빈장씨를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한 이후, 신위를 봉안할 사우 건립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처음에는 대신들이 별묘(別廟)를 건립하자는 의견을 개진했으나 경종은 희빈의 궁가인 희빈방(禧嬪房) 내에 건립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희빈방 내부 공간이 좁다는 이유로 입지를 다시 살피게 되었다. 그 후보지로는 취현동(聚賢洞)의 숭선군(崇善君) 옛 집터와 향교동의 완풍부원군(完豐府院君)이서(李曙)의 집이 거론되었다. 이에 경종은 향교동완풍부원군 집을 낙점하고 기와집 104칸, 공대(空垈) 718칸을 신정은(新丁銀) 1,900냥(兩)을 내려 구입하고 그곳에 사우를 건립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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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 공사 도중 한양 내에서 목재를 구입하기 어렵게 되자, 내수사(內需司)에서 쓰려고 경기도 양근(楊根: 현 경기도 양평)에서 베어 온 목재를 가져다 쓰기도 했다. 대빈사우(大嬪祠宇)의 청사(廳舍)는 새로 지었지만 나인들이 거처할 곳은 기존의 완풍부원군 집을 고치고 도배를 새로 하여 사용하였다. 공역이 끝나고 희빈장씨의 신위를 옮긴 날은 1723년(경종 3) 6월 3일이다. 이때부터 이곳은 대빈궁이라 불리며 희빈장씨의 제향과 그에 소용되는 제물을 관리했다.

이후 1870년(고종 7) 정빈이씨(靖嬪李氏), 영빈이씨(暎嬪李氏), 의빈성씨(宜嬪成氏)의 사우와 함께 육상궁의 별묘에 합봉(合奉)했다가(『고종실록』 7년 1월 2일) 1887년(고종 24) 원래의 자리로 되돌렸다. 1907년(융희 1)에 궁내부령으로 내수사와 궁장토의 도장(導掌)을 폐하면서 대빈궁 소속 토지도 제실 재산 관리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1908년(융희 2)에는 왕실의 제사 및 의례를 축소한다는 명목하에 대빈궁의 위패도 육상궁으로 옮겨 봉안하고 1년에 2번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당시 육상궁에는 영조의 후궁이자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생모인 정빈이씨의 연호궁(延祜宮),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저경궁(儲慶宮),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의 선희궁(宣喜宮),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綏嬪朴氏)의 경우궁(景祐宮)이 함께 옮겨 왔고 1929년에는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덕안궁(德安宮)까지 들어오면서 7명의 신위를 모시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곳을 칠궁(七宮)이라 부르게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관계망